Rhine 강을 만나다
홧김에 독일 뒤셀도르프에 갔다(02)
홧김에 독일 뒤셀도르프에 갔다(01)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들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다미는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쉽사리 잠에서 깨어 나오지 않았다. 이 집의 주인 김다미가 출근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숙면을 취한 다미였다. 알게 모르게 몸에 긴장을 가득 채워 놨다가 친구집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모든 긴장감을 훨훨 풀어낸 결과였다. 밤잠이 없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15시간 넘게 숙면을 취한 다미는 드디어 가벼워진 눈꺼풀을 열어 자신의 방 천장이 아닌 낯선 천장을 바라본다.
'아, 나 진짜 왔구나.....'
다시 한번 자신이 독일에 있음을 느끼며 어슬렁어슬렁 거실로 나왔다.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나는 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바로 옆 식탁의자에 앉으니 이미 동선을 예상한 듯 김다미가 남기고 간 메모가 보인다.
' 라인 타워 가는 법 : Rhine Tower'
1. 구글 맵으로 검색 후 자전거 버튼을 눌러서 자전거 경로를 안내받는다.
2. 현관 앞의 자전거 거치대에 핸드폰을 잘 껴서 (고무여서 잘 늘어남) 고정한다.
3. 왼쪽 핸들의 작은 네모의 on버튼을 눌러서 전기를 구동시키고 속도 조절은 삼각형 모양을 누른다.
4. 도착하면 정문 우측에 위치한 자전거 주차장에 주차한다. (열쇠는 자물쇠에 꽂혀 있음)
5. 입장료 10유로와 생수 한 병을 준비해 간다. (식당에서 물도 사 먹어야 함)
"풋, 진짜 김다미 진짜 이건 또 언제 적어 놨데."
마치 손녀가 할머니에게 설명하듯 하나하나 자세하게 적어놓은 설명서를 보면서 다미는 괜스레 뭉클해졌다. 어제저녁 아무런 계획이 없는 이 못 말리는 친구에게 자전거로 쉽게 갈 수 있는 근처 전망대를 추천해 준 김다미였다. 분명히 어제저녁 제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긴 했는데 몰려오는 피곤함에 거의 기억을 못 했던지라 김다미의 세심함이 너무 고마웠다.
다미는 친구의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메모지에 적힌 대로 준비를 마친 뒤, 떠나기 전 자전거에 앉아 사진을 찍고 김다미에게 카톡을 보낸다.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호스트님!'
자전거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듯한 외국인이 걸어오더니 "Hallo" 하며 인사를 건넨다. ‘오오오오오! 할로 할로!! 독일어!!' 인사말 정도는 미리 외운지라 마음속에선 신나서 오두방정 난리가 났지만, 살짝 미소 지으며 인사에 답한다.
"Hallo!"
사실 여행오기 전에 읽었던 책에 '외국인과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하세요' 문구를 읽으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경험해 보니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과 고작 인사에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다미였다. 그리곤 정작 한국에선 이웃주민과 단 한 번도 인사를 해본 적이 없음을 깨닫곤 한국에 돌아가면 꼭 인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고작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인데, 마치 이 동네에 오래 살았던 기분이 든다. 계속해서 다미를 따라다녔던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불편함이 인사 한 번에 날아가기 시작한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아파트에서 나와 상쾌한 공기를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그렇게 약 15분 남짓 달려 라인타워에 도착한 다미는 지금껏 달려온 자전거 도로에 감탄을 하며 자전거에서 내렸다.
"우와, 자전거길 진짜 너무 잘 되어 있다! 대박, 다른데 안 가고 독일에서 6개월 동안 자전거만 타고 다닐까?"
자전거 여행을 진심으로 고민을 할 정도로 자전거 도로는 너무나 잘 만들어져 있었다. 라인 타워로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전거 길이 끊어 진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는 길에 본인 외에도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다미는 자전거를 주차하고 타워에 입장하기 전 잠시 가만히 그들의 일상을 관찰해 본다.
일상인 듯 슈트차림에 백팩을 메고 달리는 직장인부터 학생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할아버지도 사이좋게 나란히 튼튼한 다리를 자랑하며 곧은 허리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우와, 자전거가 생활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허리가 굽으신 분들이 하나도 없네."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노부부를 바라보고 있자니, 종이 박스를 잔뜩 쌓인 리어카를 굽은 허리로 끌던 한국의 노인분들이 생각이 났다. 워낙 복잡한 서울길이라 종종 찻길로 내려오시는 경우도 있어 자동차들이 빵빵 거리며 경적을 울려 되던 일이 생각이 났다. 상상만으로도 복잡한 서울 도로에 울려 퍼지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실제로 귓가에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순간, 다미는 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작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네!"
마치 틀린 그림 찾기 게임을 하는 듯 다미는 문뜩문뜩 다름을 발견했고, 그때마다 묘하게 씁쓸했고 아쉬웠다. 한국도 분명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높은 기술 수준을 자랑하는 나라지만, 독일에 와보니 사소한 것 몇 가지만 바뀌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아쉬움과 희망이 동시에 드는 다미였다.
"오, 완전 롯데 타워랑 똑같네, 킥킥"
친구가 적극 추천했던 전망대에 올라온 다미는 원형의 전망대를 빙그르를 돌면서 익숙한 느낌에 혼자서 킥킥거렸다. 실내는 몹시나 익숙한 대형 도넛모양의 구조로 텔레비전 타워라고도 불리는 라인타워는 360도로 뷰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라인 타워 주변의 한동안 창문에 붙어서 거대한 컨테이너를 싣고선 지나가는 화물용 배를 한참 동안 구경하고 있자니 눈앞에 보이는 강 이름이 궁금해진 다미는 지도를 열어 확인한다.
‘라인강? 어디서 많이 들어본 강인데?’
친절하게 한국말로 라인강(Rhein) 표기된 맵을 보며 다미는 익숙한 이름에 또다시 검색을 해본다. 라인강은 스위스 중부 알프스에서 발원해서 독일, 네덜란드를 경유하며 길이가 무려 1230km인 강이었다. 특히 라인강이란 이름이 켈트어의 'Renos: 흐르는 것'에서 유래했으며 영어의 'run'이란 단어도 역시 여기서 유래했다는 재미있는 설명에 더욱 흥미가 갔다. 다미는 뒤셀도르프 아래,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네덜란드를 지도에서 확인한다.
'좋아, 다음 여행지는 나도 라인강을 따라서 네덜란드!'
즉흥적으로 다음 여행국가를 네덜란드로 정한 다미는 전망이 환하게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착석했다. 높은 빌딩이 들어선 도심 맞은편에 대조적으로 갈색 지붕에 하얀 몸체를 자랑하는 유럽식 집들을 바라보며 따뜻한 카푸치노를 한 모금 넘겼다. 물론 카메라에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슬슬 허기짐을 느낀 다미는 구글지도를 열어 별점 4점 이상의 가게를 필터링 후 찬찬히 훑어보다가 수제 햄버거 가게를 발견하고 발길을 돌린다. 햄버거는 어딜 가도 기본은 하기에 실패하지 않겠지 라는 마음으로 선택한 이유도 있지만 사실 다미는 리뷰에 있던 가게 인테리어를 실제로 만나보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 한국 정육점을 연상시키는 붉은색을 메인으로 특색 있는 스포츠 용품들과 그림으로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물론 햄버거 빵을 비집고 나와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두툼한 고기 패티 사진도 한몫했다. 다미는 군침을 다시며, 전기 배터리의 힘을 빌려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다미는 붉은 벽돌 인테리어가 굉장히 인상 깊은 레스토랑에 조심조심 들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카운터에서 시크한 인상의 주인이 'Hallo' 라 인사를 건넨다. 다미도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 ORDER라고 적힌 곳에서 메뉴를 차근차근 훑어봤다. 메뉴판에 독일어와 영어가 같이 적혀 있어서 메뉴를 고르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다미는 가장 기본인 햄버거만 단품으로 주문한 뒤 방금 자신이 서 있었던 곳을 카메라에 담는다. 붉은 별돌에 붉은 소화기, 붉은 문 모든 곳이 새빨간 레스토랑을 감탄하며 둘러보기 시작한다.
카운터에서 뒤를 돌아 바라보니 한 벽면을 가득 매운 특색 있는 인물 그림들이 다미를 반긴다. 그림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그 사이 살짝쿵 귀엽게 자리 잡은 헬로키티에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나온다. 워낙 원색의 빨간색이라 살짝 위협적인 느낌이 날 수도 있는데, 특색 있는 그림들 덕분에 마치 힘차게 뛰는 심장처럼 생동감이 물씬 느껴지는 인테리어였다. 다행히 늦잠을 잔 탓에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평일 낮시간이라 식당엔 다미 외에는 손님도 없어서 마음껏 사진을 찍어 될 수 있었다.
'역시, 일찍 일어난 새는 피곤하다는 말이 맞아! 늦장 부리니 이렇게 여유롭게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얼마나 좋아!'
다미는 유명 연예인의 어록을 떠올리며,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하곤 가게를 모두 담을 작정인 듯 연신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신나게 그림구경을 끝내고 뒤를 돌아보니 벽을 대신하는 유리장안에는 더욱더 엄청난 소품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우와, 엄청난 Supreme 들이다!'
농구, 권투, 야구 등 다양한 스포츠 분야의 물품들이 나름 자신들만의 규칙으로 배열되어 있는 진열장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수 없었다. 이곳이 햄버거 가게인지 SUPREME 전시장인지 헷갈릴 정도로 빼곡히 자리 잡고 있는 소품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눈에 담기 시작했다. 워낙 많은 소품들 덕분에 햄버거를 주문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카운터에서 다미의 햄버거가 나왔음을 알린다.
"Danke!(감사합니다.)"
윤이 나는 햄버거 빵에 다미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 슈프림 로고가 박혀있는 소품이 가득한 유리장 옆에 자리 잡는다. 보기만 해도 바삭함이 느껴지는 패티 앞에서 엄청난 인내심으로 카메라에 담아낸 뒤 한입 가득 입에 넣었다. 역시 구글 리뷰 평점을 보고 가면 실패할 일 없다는 책의 내용에 다미는 격하게 공감을 하며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한 패티를 마음껏 음미했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며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 간다. 머시룸 버거, 베이컨 버거 등등 더 푸짐하게 햄버거를 빵빵하게 만들어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깔끔하게 양파와 패티만 들어간 버거를 골랐다. 심플 담백한 맛을 좋아하는 다미는 라면 끓일 때도 국물의 본연의 맛을 보존하지 위해 계란 노른자도 터뜨리지 않는다. 역시나 패티 육즙에 정성을 들인 햄버거에 매우 만족한 다미였다.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야 김다미에게 카톡이 온 걸 알아챈 다미는 메시지를 확인한다. 마치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는 김다미의 카톡에 입꼬리가 활짝 올라간다.
'라인타워는 다녀왔니? 길 헤맨 거 아니지?'
'킥킥, 걱정 마셔! 이미 다녀왔지롱, 그리고 나 혼자 햄버거도 주문했어!'
다미는 친구의 카톡에 신이 나서 지금껏 찍은 사진과 햄버거 가게의 사진을 전송한다. 그러자 마자 바로 메시지로는 답답한지 바로 페이스톡을 거는 김다미였다. 덩달아 신이 난 다미도 벨이 울리기도 직전에 바로 전화를 받는다.
"열! What's Beef에 갔구나, 거기 맛있지! 혼자서도 잘하네 우리 박다미!"
"그럼! 네 자전거 덕분에 이곳저곳 잘 다니고 있어! 감사 감사!"
"별말씀을, 내일 가기로 계획한 곳 없으면 쾰른으로 크리스마켓 구경 갈래? 마침 지금 12월이라 구경하기 좋은 시기야."
"내가 계획이 있을 리가, 내가 고맙지! 크리스마스 마켓?! 너무 기대된다!!"
말로만 듣던 크리스마스 마켓에 갈 생각을 하니 다미는 벌써부터 신이 나서 어깨가 들썩들썩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땐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엔 마법이 있는 것처럼, 단어만 듣기만 해도 행복해지고 황홀해졌었다. 하지만 회사에 들어가고 나니 공휴일은 시스템 작업하기 매우 적합한 날이었고, 개발자인 다미에게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는 동료들과 밤샘 작업 후 아침에 컵라면하나 먹고 들어가는 날이 되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마켓이라니! 오랜만에 느끼는 황홀감에 눈물이 핑 도는 다미였다.
'에고, 나도 주책이다.'
스스로 다독이고 목도리를 둘러매며, 나갈 채비를 하는 다미의 눈에 귀여운 고기 그림과 조각상 들어온다.
"우앗! 이거 뭐야, 완전 웃긴데 귀여워!"
잠시 쳐졌던 자신을 고기로 위로하는 듯, 진지한 예술 작품에 다미는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크게 웃어버렸다. 이렇게 동네 햄버거 가게에도 행복들이 숨어 있는데 앞으로 만나게 될 다양한 장소에선 또 어떤 새로운 만남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지 몹시 기대되는 다미였다.
"그래, 역시 오기 잘했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과의 여행을 이어가는 다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