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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섭 Feb 02. 2022

'크래프톤 웨이', 이기문

처절하고, 처절하고, 처절한 어느 스타트업의 결과적 성공기

대학(원) 시절 나는 벤처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 곳인지 궁금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스타트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전이었다.) 일반 기업과는 다른 곳이라는데,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일하는 곳인지 도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내 주변에 창업자가 없었기 때문에 물어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국내에 벤처 이야기에 대해서 출간된 책도 없던 시절이었다. 수소문 끝에 ‘마우스 드라이버 크로니클’, ‘승려와 수수께끼’ 같은 책을 원서로 구했지만 (지금은 번역판이 있다), 내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했다.


‘크래프톤 웨이’는 대한민국의 대표 유니콘이자, 가장 주목받는 스타트업 중의 하나인 크래프톤 (구, 블루홀)을 창업 시기부터, 배틀그라운드로 성공에 이르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은 경영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사관이 쓴 사서"에 가깝다. 크래프톤의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한 책이 아니라, 창업이 어떻게 이뤄졌으며, 어떤 경영 원칙을 어떻게 만들었고, 누가 어떤 조직을 왜 맡고 떠났으며, 어떤 고난과 고초를 겪었고,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가치 판단은 최대한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 무미건조하게 다룬다.


놀랍게도 경영진 일부는 그냥 이메일 계정을 통째로 사관(작가)에게 넘겼다. 덕분에 크래프톤 내에서 경영진 사이에, 경영진과 직원 사이에, 부서 간에 어떤 식으로 이메일이 오가면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는지를 날것 그대로 볼 수 있다. 그야말로 극사실 주의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이 벤 호로위츠의 명저 ‘하드씽’의 한국 버전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극도로 내부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이 정도의 민낯을 드러내는 책이 실리콘밸리가 아닌 국내 기업에 대해서 나온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 점에서 찬사가 아깝지 않다. 내가 학창 시절 궁금했던 ‘스타트업이라는 조직이 어떤 곳이며, 어떻게 일하는가’를 간접 경험하기에는 국내 책 중에는 이만한 책이 있을까 싶다.


예를 들어, 공동 창업자들 사이에서 트러블이 있었던 이야기, 개발한 게임이 사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거나, 중간에 엎어진 이야기. 주요 경영진이 노발대발했다가 사과한 이야기, 장병규 의장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쓴 (하지만 결국 전송하지 않은) 이메일, 권한을 잃자 그냥 잠적해버린 공동 창업자, 돈을 구하지 못해 자산을 담보로 잡힌 이야기, 직원들의 대량 퇴사.. 등등이 그대로 나온다.


이렇게 이 책에 나오는 크래프톤은 처절하고, 처절하고, 처절하다. 창업자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독자일수록 이 책은 읽기가 더 어려울 것 같다. 숨이 턱턱 막힌다. 이 책의 등장인물에게 감정 이입하기 쉬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독자일수록 쉽게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스타트업 대표님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큰 스트레스를 받으실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묵직한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좀 혼란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크래프톤의 대표 게임인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에 이르렀던 이야기 때문이다. 사실 블루홀 스튜디오 (크래프톤의 원래 이름)는 창업 후 10년 동안 계속 실패를 거듭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최고의 인재들과 함께 팀을 꾸려서, “게임의 명가”라는 비전, 기존 게임 업계의 구태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철학과 함께, 제작-경영의 분리 등의 철저한 경영 원칙으로 출발했지만, 야심작이었던 테라는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다른 게임들도 중간에 엎어졌거나, 성과가 미미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경영적인 판단과 결단 등이 있었지만 여하튼 결과가 그랬다.


그러다가 갑자기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온, 배틀그라운드가 돌연 신화적인 성공을 쓴다. 이 지점이 당황스러웠다.


이 책을 집어 들었던 당연한 이유는 ‘크래프톤이 과연 배틀그라운드라는 역사적인 게임을 어떻게 개발했는가’라는 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배틀그라운드는 이 책의 후반부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언급된다. 책의 처음부터 중후반까지는 블루홀 스튜디오의 여러 경영 원칙, 인재상, 블루홀 연합군 전략, 어떤 프로젝트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실패 혹은 제한적인 성과를 거두었는지가 주로 언급된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험난하고 처절한 과정을 거치면서 갈고닦은 역량과 경험들”을 기반으로 배틀그라운드라는 역작이 만들어졌겠구나를 예상하면서 책을 읽게 된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배틀그라운드는 크래프톤의 경영 원칙이나, 그동안의 실패를 거치며 쌓았던 역량들, 체계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나온 게임이 아니었다. 배틀그라운드는 김창한 PD라는 한 명의 ‘미친’ 리더가 거의 별동대 수준의 팀을 악전고투로 이끌면서 개발한 마스터피스였다. 그 과정에서 회사의 지원은 사실상 거의 받지 못했다. 이 별동대는 실제로 정규 조직도 아니었다.


그동안 고수해온 크래프톤의 경영진, 경영-제작 간의 견제 등의 원칙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경영진은 이 프로젝트를 믿지 못하고 계속 딴지를 걸기 일수였고, 배틀그라운드라는 마스터피스가 가지는 가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배틀그라운드의 출시 이후에 시장 반응이 심상치 않고, 이것이 태풍으로 변하고 있을 때조차도 경영진을 이 게임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김창한 PD는 이런 과정에서, 도무지 설득되지 않는 경영진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여러 번 표출한다. 담대한 비전을 이야기해도 돌아오는 것은 경영진의 회의였다.


“게임의 명가”라는 비전을 수업이 강조하는 회사와, 이를 위해 제작과 경영의 견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는 기업 구조는 배틀그라운드가 탄생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견제’가 김창한 PD의 오기를 자극하여 역량을 극한까지 모두 끌어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기에 경영진은 너무 나이브하게 보였다. 매 챕터 마지막에 ‘장병규의 메시지’라는 장병규 의장이 직접 쓴 짤막한 섹션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이 글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와는 별도로, 이 역시 결과론일 수는 있겠지만 김창한 PD가 쓴 ‘리더의 조건’이나, 경영진과 팀원들에게 보냈던 메일은 정말로 큰 인상을 주었다.)


배틀그라운드가 등장하기 직전, 창사 10주년을 맞은 크래프톤은 거의 망하기 일보직전의 회사였다. 남은 현금이 10억 이하로 떨어지기 직전이었고, 창사 기념행사에 쓸 3,000만 원이 아까워서 망설이던 회사였다. 한 해 200명이 넘는 직원이 퇴사했다. ... 하지만 배틀그라운드의 출현으로 결국 크래프톤은 모든 수치를 반전하고, 일약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결국 김창한 PD는 크래프톤의 수장이 된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어가야 할까. 기승전결에서 전과 결이 뚝 끊어진 느낌이다. “큰 비전과 좋은 경영원칙으로 시작해서, 10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며 처절한 고생을 하면서 버티고 버텼다. 그런데 갑자기 성공했다”. 스타트업이라고 하는 조직이 원래 이렇다고 해야 할까. 성공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해야 할까.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내가 느꼈던 혼란함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분명 이 책에는 책의 제목인 '크래프톤의 방식'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하지만, 하지만 그 '크래프톤 방식'은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에 기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되어 보였다. 배틀그라운드는 기승전결 없이 그냥 튀어나온 돌 연변이었다.


과연 성공하는 기업은 무엇인가. 기업의 성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크래프톤 스토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주변 몇몇 VC들이 포트폴리오 스타트업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는데, 투자사들은 피투자사들이 이 책에서 과연 무엇을 읽어내기를 원하는 것일까.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 미숙한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엇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머리가 좀 복잡하다. 


(2021년 7월에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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