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 특화된 반직관적인 경영 전략
블리츠 스케일링은 스타트업이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책이다. 페이팔 마피아 중 한 명이자 링크드인의 창업가인 리드 호프먼이 쓴 책으로, 내가 읽었던 '스타트업' 경영학 책 중에서 가장 좋았던 책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DHP 포트폴리오들에게도 많이 권했던 책이기도 한데, ‘헬스케어 스타트업의 경영학 읽기’ 트레바리 북클럽의 두 번째 책이어서 이번에 다시 읽었다. 다시 읽으니 역시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였다.
블리츠 스케일링은 스타트업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효율보다 속도를 우선시하면서, 맹렬한 속도로 스케일을 키워서 (퍼스트 무버가 아닌) 퍼스트 스케일러가 됨으로써 시장의 경쟁 구도를 장악해버리는 전략을 의미한다. 내가 이 책을 첫 번째 읽을 때 크게 느꼈던 것은 이런 전략 자체에 대한 신선함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러한 빠르게 성장하는 전략이 스타트업 그 자체구나 하는 것이었다. 즉, 이 책은 스타트업이 사용할 수 있는 특정 ‘전략’에 대한 책이 아니라, 스타트업에 특화된 경영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트업은 무엇을 위한 조직인가? 결국 스타트업은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조직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부족한 인력, 시간, 자금을 바탕으로, 대기업 등 산업의 기존 사업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스타트업들과의 경쟁에서도 승리해야 한다. 스타트업은 매우 특수하고도 어찌 보면 비합리적인 조직이다. (큰 것으로 큰 것을 이루는 것은 합리적이나,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루겠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고.) 그렇기 때문에 스타트업은 스타트업에 맞는 특화된 경영 방법론이 필요하다.
특히, 기존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주류 경영학은 스타트업의 경영에 적합하지 못하다. 경영학과나 MBA 등에서 가르치는 경영학은 연 15%만 성장해도 엄청난 성장이라고 여겨지는 대기업을 위해서 정립된 것이다. 매주 15%씩 성장하는 스타트업이라면, 전략, 인사, 재무, 리더십 등 모든 측면에서 기존의 경영학에서 받아들여지는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이것이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협업이 어려운 이유이며, 또한 대기업에서 스핀오프 한 사내벤처의 성공확률이 낮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블리츠 스케일링을 위한, 아니 스타트업이 스타트업 다워지기 위해 필요한 전략은 반직관적이며, 때로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스타트업이라는 조직 자체가 근본적으로 반직관적이며 비합리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해적단’과 같은 조직임을 이해한다면, 당연히 스타트업에 특화된 경영 방식과 전략도 그러해야 함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렇게 스타트업이 그 존재 목적에 맞게 미친듯한 속도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전략과 사례, 피해야 할 함정들이 나온다. 그중에는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무의식 중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많다. 네트워크 효과의 활용, 바이럴리티, 매출총이익 등등의 개념. 특히 반직관 전략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가장 적합한 사람이 아닌 당장 필요한 사람을 뽑아라, 급한 불길이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둬라, 고객을 무시해라(!),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큰돈을 투자받아라, 부적합한 관리를 무시하라 등등.
이러한 반직관 전략들은 제목만 보면 완전 정신 나간 이야기 같지만 (‘고객을 무시하라’ 등등), 모두 효율보다는 속도를 중시하기 위해서 스타트업이 적어도 일시적으로 써야만 하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서 비행기를 조립하는 것이 스타트업이라면, 비행기를 조립하는 동시에 부스터까지 다는 것이 블리츠 스케일링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 전반의 우선수위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우선순위라 함은 꼭 필요하지만, '(일단은) 고객을 무시하라'와 같이 '당장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렇다고 모든 스타트업에 이런 전략이 유효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는 블리츠 스케일링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효율’을 속도보다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바로 ‘언제’ 블리츠 스케일링을 시작해야 하는 가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 그리고 트레바리 북클럽 멤버들이 독후감에서 가장 많이 언급했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대체 이런 전략을 시작할 수 있는 적기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수학공식과 같은 대답은 PMF를 찾았을 때, 고객획득비용(CAC) 보다 고객생애가치(LTV)가 유의미하게 더 커졌을 때 등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 이런 잣대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 전략을 수행하려면 자금이 통상적인 수준보다 훨씬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VC 등 재무적 투자자의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오늘 트레바리 클럽에서 핵심적으로 논의해볼 부분도 바로 ‘언제가 적기인가’ 하는 부분이다. (반대로 나와 같은 투자자의 고민은 돈으로 밀어줘야 할 적기가 언제인가..가 되겠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점은 아무리 성장에 대한 전략이라도, 스타트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전략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스타트업을 가족 (~9명), 부족 (~99명), 마을 (~999명), 도시 (~9,999명), 국가 (1만 명 이상)의 단계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다. 각 단계에 따라서 성장 전략뿐만 아니라, 리더십, 커뮤니케이션 방법, 의사결정 구조 등이 계속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창업자 본인이 끝없이 성장해야 하고 (‘학습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나온다), 조직도 해적에서 결국 해군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문제를 무시하면서까지 공격에 치중했던 ‘부족' 단위의 ‘해적’은 그 전략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체계를 갖춘 ‘국가’를 건설하고 방어를 위한 ‘해군’으로 변모해야 한다. 나는 흔히 '스타트업의 미래는 대기업이다’는 말을 즐겨 쓰는데, 이런 과정이 책에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헬스케어 스타트업 중에 블리츠 스케일링 전략을 취하는 곳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유니콘이 나왔던 핀테크, 배달, 콘텐츠, 엔터테인먼트 쪽에서는 이런 전략을 활용하는 곳이 더러 있지만, 유독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이 전략을 제대로 쓰는 스타트업이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분야의 특성일 수도 있고, 재무적 투자자들이 충분히 총알을 지원해주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고, 스타트업의 역량이 충분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혹은 단순히 지금까지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이제는 이런 스타트업들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약진을 시작한 단계인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꿈이 있다면, 한국의 헬스케어 분야에서도 이런 블리츠 스케일링을 실행하여 압도적인 속도와 규모를 자랑하는 스타트업이 나오는 것. 조금 더 큰 꿈이라면 그런 스타트업이 DHP 포트폴리오 중에 나오는 것이다. 오늘 트레바리 북클럽에서도 이를 위해서 열심히 토론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