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알베르게

초보 경찰관의 제주도 정착기-2

by 임준형

나에게 인생 여행지가 어디였냐고 질문한다면, 주저 없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언급하곤 한다. 여행지가 주는 낭만, 음식이 전달하는 환희, 순례자를 위한 저렴한 물가 등 산티아고 순례길의 추억을 나열하자고 하면 밤새 위스키 한잔을 곁들여 설명해도 부족할 지경이다. 다만 순례길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기회를 봐서 읊도록 하고, 이 글은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인 ‘알베르게’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Albergue(알베르게)는 ‘숙박업소’를 뜻하는 스페인어로, 대표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의미하는 대명사 격으로 이용되는 단어이다. 1인실이나 2인실보다는 4인실 이상의 다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저렴한 가격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어 대부분의 순례자가 이용하는 곳이다. 최근에는 알베르게의 시설이 상향 평준화되며 금액도 많이 올랐다고 들었지만, 내가 순례길을 걸었던 2017년만 하더라도 하루 평균 10유로에서 15유로 정도면 좋은 시설의 숙소에 묵으며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살인적인 유럽의 물가를 생각한다면, 알베르게는 고된 하루의 행군을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는 곳인 셈이었다. 특히 알베르게에서 다른 순례객들과 함께 갖는 술자리, 주인장의 따뜻한 미소, 뽀송하고 푹신한 이부자리의 감촉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첫 발령을 앞두고, 급하게 구한 항공권만큼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숙소였다. 직접 매물을 보지 않고 2년간 살 집을 계약하기에는 겁이 났고, 무엇보다 관사에서 거주할 가능성도 있었기에 임시 숙소를 구해야 했다. 운전이 익숙하지 않아 차가 없었던 만큼, 제주 동부경찰서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숙소를 찾아봤다. 하지만 인근 호텔들은 관광지라 그런지 대부분 가격대가 높았고, 모텔들은 유흥가에 위치하다 보니 선뜻 숙소로 선택하기 어려웠다. 염치 불고하고 제주 출신 동기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할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모두 경찰서에서 먼 곳이라 부탁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제주도로 출발하는 날이 돌아왔고, 공항에 도착해서야 해외여행에서 유용하게 이용했던 에어비앤비 어플이 떠올랐다. 투숙 날짜와 지역을 입력하니, 경찰서 인근에서 운영되는 숙박 시설이 한 곳 검색되었다. 이용 후기도 없었고 상세 사진도 많이 없었지만,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기에 큰 고민 없이 예약을 완료한 후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제주 동부경찰서 앞에 도착해 한참 멍하게 서 있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저녁 10시에 가까워졌다. 다음 날 부대에 방문해 같이 근무하게 될 직원분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경찰서 부근도 구경하려면, 얼른 들어가서 잠을 청해야 했다. 어플을 켜 숙소 위치를 다시 확인해 보니, 경찰서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미 섬에 이질감을 느껴버린 육지 사람이라 그런지, 숙소로 향하는 길도 너무 생소하게 느껴졌다. 분명 불금인지라 아직 건물의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술에 취한 사람들로 길거리가 북적여야 하는데, 이상하리만큼 시가지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술집 몇 곳만 불을 켠 채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마저도 주거 지역에 가까워지니 거의 없었다. 적막을 깨는 캐리어 바퀴 소리와 함께 숙소 앞에 도착해, 사전에 안내받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앞으로 5일간 나를 품어줄 방에 입장했다. 1인이 쓰기에는 충분히 큰 원룸 안에는 주방 시설과 커다란 조명, 식탁 겸 책상, 옷걸이와 침대 매트리스가 갖춰져 있었다. 주인 분은 바로 위층에 거주하신다고 들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문자로만 입실 사실을 알렸다.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렸던 나는, 씻지도 않고 그대로 매트리스에 몸을 던져 단잠에 빠져들었다.


이후로 4일간 제주에서 지내며 주인 분을 뵙지는 못했지만, 휴대전화를 매개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 사장님께 받은 도움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 보자면 아래와 같다.



○ 청장님 앞에서 발령 신고를 하기 위해 정복을 구김 없이 다려야 했는데, 사장님께서 사용하시던 다리미와 다리미판을 직접 방 앞으로 배달

○ 사전에 조율되지 않았던 추가 숙박 인원(동기)에 대해 추가 비용 없이 투숙 허락

○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매일 방 청소 및 수건 교체

○ 인근 도보 여행지 및 교통편 정보 제공



그렇게 사장님의 도움만 받다 보니 첫 당직 근무도 무사히 마치고 퇴실할 날이 되었다. 다행히 집을 구하기 전까지 관사를 이용할 수 있게 된 나는, 택시를 부르기 전에 사장님께 감사 인사를 어플 메시지로 보냈다. 그랬더니 가기 전에 올라와서 커피나 한잔하고 가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준비를 마친 후 한 층 올라가니 60대 정도로 보이는 사장님 내외분께서 발코니에 따뜻한 빵과 커피를 준비해 기다리고 계셨다. 제주도에 오고 정말 오랜만에 마주하는 인간의 진실된 온기였다. 두 분께서는 경찰관으로 임용되어 첫 근무지로 제주도를 선택했다는 나의 얘기를 듣고는, 좋은 선택이라며 응원해 주셨다. 그러고는 제주 생활에 대한 조언, 계절별로 꼭 방문해야 할 곳들, 제주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언 등에 관해 정말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게다가 차가 아직 없다는 얘기를 들으시고는, 택시비라도 아껴야 한다며 직접 나를 태워 새로운 관사까지 얼마 안 되는 짐도 옮겨주셨다. 그리고 제주 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며 연락처까지 알려주시고 나서야 힘찬 응원과 함께 돌아가셨다. 그날 저녁 사장님께서 에어비앤비 후기를 남겨주셨는데, 읽으며 가족 같은 포근함이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기분 좋은 guest였습니다.
젊은 만큼 패기 있게 처음 부임한 곳에서 좋은 사회생활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20250423 후기 사진-2.jpg <당시 받았던 에어비앤비 후기>


그때까지 제주도는 여행 차 두 번 정도 방문했던 게 전부라, 내게는 ‘먼 나라 이웃 나라’에나 나올 법한 타국처럼 느껴졌었다. 제주공항에 앞에 써진 ‘혼저옵서예’라는 말도, 지난 며칠간 마주한 제주도민들의 이해하기 힘든 사투리에도, 그리고 굳이 제주도 발령을 선택한 육지 출신 초급 간부를 향한 다른 경찰관들의 묘한 경계심에 외롭고 지쳐있던 때였다. 그래서일까. 그날 숙소지기님의 나에 대한 친절과 배려는 마치 타국에서 만난 동포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처럼 느껴졌다. 혹은 고된 하루의 순례 일정을 마치고 숙소를 찾은 우리를 맞이해 주는 알베르게 사장님이 보여준, 따스한 스페인 햇살 같은 환대가 겹쳐져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친절은, 2년 동안 제주도에서의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이후 2020년 제주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육지로 돌아왔고, 언젠가 시간이 비어 제주 여행을 할 일이 생겼다. 왠지 나를 기억 못하시더라도, 사장님께 그때 감사했다는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에어비앤비를 검색해 봤지만, 아쉽게도 숙박 시설 운영을 종료하셨는지 더 이상 검색이 되지 않았다. 당시의 속상하고 아쉬웠던 마음과 지금까지도 갖고 있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 짧은 글에서라도 인사를 남겨본다.


“사장님. 잘 계시죠?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