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이거나 쪽박이거나

by 임준형

“자네 운명은 50:50이야. 완전 대박이 나거나 쪽박이거나 둘 중 하나야.”


누군가가 나의 운명을 처음으로 말해 줬던 때는 아마 19세가 되던 해 겨울이었다. 아들의 입시가 지상 최대 과제였던 나의 어머니, 박 여사는 방학 동안 나를 대치동으로 유학 보내셨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에 막 올라갈 때였지만, 성적만큼은 고3 형·누나들보다 높게 나와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필자는 고등학교를 1년 쉬어 동기들보다 한 살 많다.) 미래가 촉망받는 지방 유학생의 겨울은 어머니의 학구열과 선생님들의 칭찬으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어야 할 텐데, 그해 겨울이 유독 춥게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 불가항력적으로 정해져 버린 나의 운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24시간 자식의 입시 성공을 위해 레이더망을 가동 중이던 어머니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나를 데리고 가셨다. (기독교 집안에서 미신이라니, 당시 어머니는 입시 당사자인 나보다 더 절박하셨던 게다. 분명 감사한 일이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다.) 점쟁이는 나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받아 적었고, 나의 손금과 관상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무서울 정도로 까맣던 그의 눈동자는 도통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어 지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 때쯤 점쟁이가 입 밖으로 꺼낸 얘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부분 낙관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유독 한마디 말씀이 마치 여름철 폭염에 흠뻑 젖은 웃옷처럼 끈적하고 찝찝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자네 운명은 50:50이야. 대박이거나 쪽박이거나.”


〈운명〉이라는 단어는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의미할 텐데, 보기 문항이 두 개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수능 만점을 받아서 좋은 대학에 갈 테고, 30살 정도부터 주변에 사람과 돈이 모일 운명이야.’와 같은 점지된 운명을 기대하고 난생 처음 점집을 방문한 고등학교 2학년 애송이는, 애석하게도 객관식형 운명론은 쉽사리 소화해 내지 못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을 고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쪽박일지도 모르는 운명에 혼란에 빠진 나는, 대치동 유학생활의 마무리를 학업 성취가 아닌 의욕 상실로 끝맺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쪽박 인생일 수 있으니까, 아니면 실컷 놀아도 대박 인생일지도 모르니까.


13년이 지난 지금, 당연하게도 아직 객관식 문항에 대한 답안을 작성하지 못했다. 어쩌면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도, 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대박(또는 쪽박(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날 일을 기다리다 시험 종료 타종이 울릴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서나 성공한 사람들의 강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워드 「운명」. 주인공들은 인생이라는 새하얀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려 미래를 만들어 갈지는 스스로 결정짓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들에게 운명은 극복 가능한 대상인 셈이다. 글자 수 제한이 없는 주관식 문항인가 보다. 문제가 어떻든, 조건이 어떻든, 그들은 생각한 답을 써 내려간다. 정답이 아닐지라도 스스로에게는 최선의 정답이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주관식 문항에 거침없이 답을 써 내려가는 이들에게 열광한다. <보기>가 하나밖에 없던 객관식 문항은 그 개수가 점점 늘어나고, 심지어 문제를 다 지우고 주관식으로 바꾸는 이들도 생겨난다. 출제자의 의도 따위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어느새 인간의 운명은 그 주인의 숨결만큼 가벼워졌고, 주인의 입 밖으로 배출되는 더러운 거짓말보다도 쉽게 뒤집히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운명이 명운을 다한 셈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길거리에는 타로점 부스와 사주 전문가, 점집이 넘쳐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은 이뤄졌을 텐데.)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용하다는 작명소에서 이름을 지어 놓고는,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면 애꿎은 이름 탓을 하며 개명을 한다. (2023년 한 해 개명 신청 건수가 16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참고로 안동시의 인구수가 15만 명이다.) 얼마 전 한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82년 7월 30일생을 만나면 인생이 펼 것이다."라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10년째 운명의 짝을 기다리는 여성이 소개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긋지긋한 운명론에서 벗어났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운명을 믿고 예견하려 부단히 애쓴다.




퇴사를 했고, ‘후’ 하고 불었더니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퇴직금과 함께 백수가 되었다. (취업 준비생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로 딱히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아서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느긋해지는데, 다들 퇴사하면 이런 걸까.) 한때 유망주였던 필자에게 분명 대안이 있을 것이라 믿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많이 헤매고 있다. 퇴사가 패착이었을까 두려워질 때쯤 10여 년 전 내 손금을 보던 점쟁이의 손의 감촉이 문득 떠올랐다면, 이 또한 점지된 운명일까.


운명의 존재를 믿는 한 사람으로서, 어쩌면 용한 점쟁이가 알려준 나의 운명은 남들은 가질 수 없는 나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점을 보고 있을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나는 나의 선택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으니까. 50:50이라면, 지금 나의 결정이 50%의 대박을 향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해 겨울 모호한 운명에 무기력해졌던 나는, 이제 초월적인 누군가가 점지해 준 운명의 무서움과 대단함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선택할 수 있는 객관식 문항이 있음에 감사한다. 2025년 초봄의 나는 여전히 무기력하지만, 어쩌면 찾아올 대박 인생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자 한다. 지금의 나도 쪽박을 벗어 던지고 대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기대하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