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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스틸러 Dec 04. 2015

여행 짐을 버리며

여행 속 새로운 발견


요란하게 울려대는 시계를 겨우 달래고 미처 깨지 못해 잠을 한참 머금은 두 눈을 흔들어 깨웠다. 창밖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가로등 불빛이 미세하게 들어왔다. "아직 해도 안 떴는데 시계가 고장 났나?" 나를 속인 시계가 원망스러웠다. 몸을 뒤척이며 얼굴을 파묻은 베개는 항상 내가 즐겨온 포근함이 아니었다. 그제야 이곳이 10시간을 넘게 날아온 스페인에 작은 숙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계는 아무런 잘못 없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고 있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이곳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10일 전 한국에서 무리하게 계획을 세운 욕심 많은 나 자신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탓하지도 못한 채 살짝 나온 입과 함께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10일이라는 여행기간은 내가 게을러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발버둥 쳤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한국에서 한참을 왔지만 한국에서의 여유 없던 나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종아리에 붙어있는 몇 장의 파스와 퉁퉁 부어 있는 발, 힘겹게 겨우 붙어 있는 신발 밑창이 이번 여행이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것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힘겨운 몸을 겨우 일으켰지만 이른 아침 차가운 물을 맞이할 준비는 아직 되어있지 않았다. 씻었다기보다는 물로 얼굴을 헹구고 떠날 준비를 시작하였다.
겉옷을 챙겨 입고 마지막으로 시선이 도착한 곳은 방구석 침대 옆 놓여있는 묵직한 짐꾸러미들이었다.
등에 메고 양손을 가득히 들어도 발밑에는 여전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가벼운 몸으로 시작한 첫날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거짓말~' 마치 마술처럼 늘어나 버린 짐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큰 결심과 함께 막 입었던 겉옷을 벗어던지고 가방을 풀어헤쳤다. 낡아버린 신발, 양말, 질려 버린 옷들을 하나둘씩 꺼내 놓았다. 정든 친구들이었지만 타지에 남겨두고 갈 결심을 한 것이다. 평소 즐기지 않았던 순서대로 차례차례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1/4 정도의 짐을 정리하였 때 분주하던 손을 멈췄다. 한국에서의 오랜 습관이 나온 것이다. 외로이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아직 쓸만한 것 같았고 언젠간 다시 찾을 것만 같았다. 그들이 내 품을 떠나면 그곳에 묻어 있는 추억들 마저 함께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항상 그랬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버리는 것이 무서웠다. 차곡차곡 쌓아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사소한 것까지 움켜쥐고 놓지 않았고 버리려다가도 결국은 제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그렇게 난 이번 여행처럼 항상 무거운 짐들을 움켜쥐고 살아가고 있었다.

작지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들의 소리 없는 애원을 외면한 채 성급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우려했던 것보다 불안과 두려움은 나의 여행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행은 풍요로워져 갔다. 무거운 짐들에 쌓여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고 힘겨운 움직임으로 인한 짜증 속에 즐기지 못한 순간들도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들이 만들어준 여유는 여행 속 새로운 추억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더욱 단단하고 높이 쌓여가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지금 나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었던 과거의 무언가를 과감하게 하나씩 벗어던졌고 그 자리는 또 다른 것으로 금방 채워져 나갔다. 캄캄하던 나의 앞길이 설렘으로 가득 찬 인생여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난 다시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행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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