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슬픔
다섯번째 죽음은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 바로 이 날이다. 슬픈 기억을 다시 꺼내어 본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시험을 보고 불알친구녀석의 집으로 갔다. 공부엔 관심이 없던 우리는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젊은남자'라는 영화를 빌려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우리집은 3층과 4층을 복층으로 쓰는 빌라에 살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4층에 아버지와 새엄마 그리고 의붓동생은 3층에서 생활했다. 4층 방에 들어왔는데 집에 있어야 할 동생이 없었다. 대신 TV에 '형, 들어오는대로 3층으로 내려와'라는 메모가 있었다. 뭔가 혼날 일이 있었나 싶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오고 나서 함께 내려가도 될 텐데, 동생이 미리 내려가 있었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3층에 내려갔더니 거실 쇼파에 고모와 동생이 앉아있었다. 생소한 광경이었다. 날 보자 고모와 동생은 서로 '고모가 이야기해' '니가 이야기해'라며 나에게 해야할 어떤 말을 서로 미루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고모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데...'
분명하게 들었는데, 어려운 문장이 아닌데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냥 멍했다.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뭘 어떻게해야 할지, 뭐.. 그런것들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머리속이 하얗게 되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라고 말하고 그길로 집을 나와 다시 불알친구놈 집으로 향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 녀석을 일단 만나야한다고 생각했다. 녀석의 집에 도착을 했는데, 집에 없었다. 아마도 학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을거고, 아마 지금 시간이면 학원 근처의 오락실에 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오락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친구는 오락실에 있었다. 한창 플레이 중인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여기서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를 불렀다. 친구는 집에 가더니 여기는 왜 왔냐고 내게 물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깐 잠깐 나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한창 게임중이던 친구는 그냥 말해라고 했다. 나가서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하고 그냥 나가자고 했더니, 지금 한창 게임중이니깐 좀 있어보라고 한다. 그 순간 갑자기 슬픔이 울컥 밀려왔다. '야 이 새끼야 좀 나와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내 눈엔 이미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 얼굴을 본 녀석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무슨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내게 일어난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냥 눈물이 자꾸 흘러나왔다. 무슨일이냐고 재차 묻는 친구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데... 나 어떻게 하지?' 라고 말하면서 설움이 터져버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당황한 친구는 아무말없이 그냥 나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잠시 친구와 슬픔을 나누고 나니, 이럴때가 아니고 빨리 집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고모와 동생은 장례식장으로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안의 우리 세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뒷자석에 앉아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일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랑 헤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픈데, 어째서 아버지마저 잃어야 하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나는 이 상황이 가족들이 꾸민 몰래카메라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말 잘들으라고, 더 착한 아들이 되라고 고모까지 합세해서 꾸민 일이라고 생각했다. 택시를 타고 어딘가에 도착하면 거기에 아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택시는 어느 병원의 장례식장에 우릴 내려주었다. 아빠가 어디에 있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내 눈엔 아빠대신 친척 어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스케일이 큰데..'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셋째 고모가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우리 광섭이 불쌍해서 어떻게 해..'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래도 아버지의 죽음을 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고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의 빈소는 장례식장 제일 안쪽이었다. 화환들이 가득한 빈소가 안쪽에 보였다. 친척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착한 아버지 빈소에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놓여있었다. 몰래카메라가 아니었다. 영정사진을 확인한 나는 그자리에 주저 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