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6시간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오늘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이 자꾸 내 마음에 설레임을 부추기고 있었다. 오늘 그녀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나와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뭘 해야 좋을지 선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함께 하는 시간동안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아니 어느정도까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함께 해 줄 것인지 궁금했다. 여자친구도 되어주려나 싶었지만 시간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챘을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걸 확인하고 싶은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정말 내일이 지나면 못보게 되는건 아닌지도 한편으로는 걱정 되었다. 머리속에 물음표가 자꾸 많아지기 시작했다.
"뭐야.. 왜 대답을 안해?"
"어?.."
"집에 안들여보내고 싶다며? 그래서 안가겠다고 했잖아."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그녀가 말을 했다. 그녀가 말하는 눈빛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만우절이다.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녀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나와 함께 더 오랜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고 있었다. 거짓말일지도 모르는 그녀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실 더 컸다.
"어..알겠어."
"그럼, 이제부터 뭐하고 싶어?"
잔을 내밀며 그녀가 던진 질문에 또 말문이 막혔다. 머리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차마 그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좋아하는 그녀와 이 밤에 남자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겠는가? 본능의 요구를 이성으로 억누르며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벌어봤지만 이성은 아직 본능에게 지고 있었다. 그때 이성이 문 하나를 열었다.
"잠깐만, 그러면 너는 뭘 하고 싶어?"
"나?"
"어. 너도 내일이 지나면 나를 볼 수 없다고 가정했을때, 뭘 하고 싶은지 말해봐."
"나는 이따가 말할래."
"뭐야~ 그런게 어딨어?"
"룰이야 룰."
"룰? 무슨 룰?"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하나 있거든."
"바라는 거?"
"어. 그런데 그냥 해달라고 하면 안 해줄 것 같아서 그래서 니가 원하는 것을 먼저 들어주려고 한거야."
"바라는 게 뭔데? 그냥 이야기해봐. 내가 들어줄 수도 있잖아."
"안돼! 들어줄 수도 있는게 아니라 꼭 들어줘야만 해. 그러니깐 니가 원하는 거 먼저 하자."
내가 꼭 들어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 마음에 쿵 다가왔다. 내가 꼭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다니 그게 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리고 정말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걸 니가 한다고 해도 내가 그 부탁을 안 들어줄 수도 있을거아냐? 그럼 어쩌려고?"
"음.. 그러지는 않을거 같긴 한데..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 생각은 안해봤다.ㅋㅋㅋ"
만우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디에서도 거짓의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술잔을 바라보며 잠시 뭔가 생각하던 그녀가 손가락 6개를 내 얼굴로 불쑥 내밀었다.
"6시간! 6시간씩 하자. 먼저 니가 하고 싶은대로 6시간 보내고, 그 다음은 내가 하고 싶은대로 6시간 보내고, 그 다음에 다시 니가 하고 싶은대로 6시간 보내고, 마지막 6시간은 내가 하고 싶은대로! 어때?"
"6시간씩?"
"대신, 이 24시간이 다 지나고 나면 정말로 우리는 서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그런 마음으로, 그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거야! 뭐.. 진심으로 그런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인생 모르는거니깐. 24시간 뒤에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진짜로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후회할지도 몰라.하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물어보고 동의를 구해서 하는거지. 참고로 뭐든지 요구할 수 있지만 모든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건 아니야. 만약 다시는 볼 수 없다면 요구를 들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 생각해보고 대답하면 되는거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럼, 지금부터 24시간으로 해줘!"
"그래! 그럼 지금부터 6시간 동안은 니가 하고 싶은 걸 하자. 먼저 말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제안 중에 가장 짜릿한 제안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 안의 모든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었음과 동시에 처음으로 날 것 처럼 살아있었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