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화양연화
예전에 본 기억이 가물가물한 영화 화양연화를 봤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한다는 화양연화, 과연 양가위 감독은 양조위와 장만옥을 통해 화양연화를 어떻게 표현했을지가 가장 궁금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굉장히 느린 템포로 진행이 된다. 카메라의 이동도 그렇고 인물들의 대사나 표정까지도 다른곳과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내용인지 미리 알고 본 영화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 주인공이 다 유부남녀로 등장하는 순간, 어떤 불륜인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 두 주인공의 배우자들이 불륜관계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로맨스에 빠지게 된다는 걸 반기지도 않았고, 또한 그런 상태에서 화양연화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끼워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는 하더라도 그것이 화양연화까지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독은 둘을 육체적 관계로 묶지 않았다. 불륜에 빠진 두 배우자들을 기준삼아 오히려 주인공들은 '우리는 그렇지 않아'라며 서로의 감정을 억누르게 한다. 그래서 두 배우는 말보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 장면이 많았다. 그렇게 감정을 억눌러가다 순간순간 뿜어져 나오는 서로에 대한 본심이 안타깝기도 했고, 어쩌면 저 순간, 저 정도에 멈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때의 감정이 어쩌면 가장 진실된 것일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우리에게 손가락질 당할 법도 한 불륜의 당사자들은 이 영화속에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 왜 감독은 그들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인터넷의 어딘가엔 그것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있는 리뷰가 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리뷰를 찾아보진 않을테다. 그저 내 나름대로 한번 추측을 해보는 것이 더 즐거울 것 같다. 어쩌면 감독은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그런건가 싶기도 하다. 누가 누구랑 불륜을 저질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그러한 상황을 만들었는지가 중요하고, 내가 그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보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속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둘이 함께 무협소설을 쓰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다면의 거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씬이었다. 알몸으로 침대위에서 뒹구는 그 어떤 베드씬보다도 더 아름다고, 애틋하고, 섹시한 그런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가 바로 그 둘의 화양연화라고 생각한다. 서로 마주보며 환하게 웃는 장면이 들어있는 그 씬은 화양연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를 보는 동안 딱히 즐겁거나 영화 자체에 깊이 몰입하게 되는 그런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보다보면 어느 순간에 내 마음이 더 깊이 주인공들에게 개입을 하고 있었다. 그 둘이 나와 같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나와 같아서 일까? 그에 대한 답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는 답할 수 없을 것 같다.
화양연화.
지나온 시간 속에서 나의 화양연화는 언제인가 싶어졌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화양연화일까? 아니면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솟아나는 기억이 화양연화일까? 아니면 그 모든 기억들을 머리속에 떠올려 놓고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갔을때 마지막에 남은 기억이 화양연화일까? 후훗. 30분이라는 시간제한 속에서 쓰는 글 안에 풀어내기에는 좀 과한 이야기인듯 싶다. 네번째 룰을 어길 수는 없다. 1분 미만을 고민해서 나온 기억이나 추억이 화양연화라고 부르기엔 자신이 없다.
그럼 화양연화까지는 아니어도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어도.. 참 행복했었던 순간들중에 지금 당장 기억나는 것을 적어보고자 한다. 여기까지 타이핑을 하는 동안에도 사실 떠오른 기억은 없다. 아무래도 잠시라도 뇌가 기억의 공간을 뒤적거릴 시간을 좀 줘야 하나 보다. 짧게 짧게 나의 기억속에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무언가가 떠오를듯 하면서도 멍한 상태가 급 찾아온다.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자, 30초만 일단 시간을 내서 뭔가를 떠올려보자.
눈을 감고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기다리고 있었더니, 검은 배경속에 흰구름들이 쫘악 펼쳐지더니 나를 네팔의 포카라로 데리고 갔다. 벨트처럼 하늘 위에 걸린 구름 위로 설산이 삐죽삐죽 솟아있다. 그 아래 3~4층 건물들이 이렇게 저렇게 펼쳐져 있다. 나는 작은 나무 보트위에 있다. 오른손에는 맥주 한 병이 들려있고 발 아래 아직 따지 않은 맥주 한 병이 더 있다. 페와라는 이름의 호수위에 누워 구름을 두른 설산을 배경삼아 마시는 맥주. 그때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봐도 그렇고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무릉도원에 잠시 머물렀던 그 때, 그래! 일단 지금의 이 기억상태로는 그때를 나의 화양연화라고 하자. 혼자만의 시간중에 화양연화, 로맨스가 빠진 화양연화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