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들른 교보문고에서 무심코 미국 동부 가이드북을 펼쳤다가 시카고 미술관을 발견한 건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에 가까웠다.
'시카고 미술관'이라고 하니 그래도 심리적 저항감이 덜하지만, 이 미술관의 영어 이름은 The Art Institute of Chicago다. 내가 굳이 여행을 가게 될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 낯선 도시에 있는, Museum도 Gallery도 아닌, Art Institute.
올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에 정작 내가 보고 싶었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대체 그 그림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검색을 하고서야 나는 이 이름도 어려운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를 보려면 암스테르담에서 기차와 버스, 셔틀까지 갈아타고 2시간 넘게 달려, 발음도 어려운 '크뢸러 묄러 미술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현실감 없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시카고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생각은 '내가 이 그림을 실제로 볼 일은 없겠구나'였다.
하지만 올해 여름 나는 암스테르담에 일주일간 있으면서 크뢸러 묄러 미술관에 가서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도 보고, 내친 김에 헤이그에 가서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처녀>도 봤다. 심지어 비트라 뮤지엄과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롱샹 성당까지 다녀왔다. (그러려고 굳이 바젤에서 3박을 했다.) 막연하게 '내가 가게 될 일은 없겠지' 생각했던 거의 모든 곳들에, 어느 순간 실제로 가서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는 거다. 생각해보면 못 갈 것이 뭐가 있겠는가.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시카고 미술관에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시카고라는 도시가 굳이 내가 길게 여행을 갈 만한 도시가 아니라는 이유가 컸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내년에 무려 2주일을 꽉 채워서 뉴욕 여행을 간다. 왜 그 중에 하루 이틀 정도 시카고에 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뉴욕에서 시카고는 2시간 10분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교보문고에서 펼친 책에서 시카고 미술관을 발견한 이후로 내 머릿속은 빠르게 여행 계획을 다시 짜고 있었다.
뉴욕 여행의 중간에 시카고에 다녀올까. 그러려면 뉴욕과 시카고간 왕복 비행기 값이 든다.
뉴욕 여행의 마지막에 시카고에 갔다가 시카고에서 OUT을 할까. 안 될 건 없지만, 여행의 막바지에 부지런하게 꽤 긴 이동을 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 뉴욕 여행의 앞에 시카고부터 가야 한다. 뉴욕 IN-OUT이 아닌, 시카고 IN 뉴욕 OUT이다. 그런데 내가 호기롭게도 뉴욕 여행 첫날 저녁부터 링컨센터 피아노 공연 예약을 해놨다. 링컨센터 예매 시스템이 애초에 모든 티켓이 환불 불가다. 돈 좀 더 내면 환불 가능하고 그런 것도 없다. 내가 공연 티켓을 얼마에 샀더라. 어휴, 좋은 자리에서 공연 보겠다고 비싼 표를 겁도 없이 샀네.
잠시 고민을 한다. 그래도 포기가 안 되어서 시카고 IN 항공권을 알아본다. 이번 뉴욕 여행은 마일리지로 플렉스하는 여행이다. 언제나처럼 뉴욕행 항공권은 프레스티지석. 그런데 뉴욕행 비행기 A380은 구형 좌석인 프레스티지 슬리퍼다. 그러고 보니 항공권 예매할 때 구형 슬리퍼에 이 마일리지를 써야 하나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카고행 비행기는 프레스티지 스위트다. 마음이 급격하게 기운다.
어떻게든 공연 티켓도 안 날리기 위해 휴가를 며칠 더 쓰더라도(이미 2주일 풀로 썼으면서) 원래 계획했던 뉴욕 여행보다 하루 이틀 먼저 시카고에 갈까 하고 알아보는데, 야속하게도 시카고행 프레스티지석 보너스 항공권은 내가 링컨센터 공연 예약을 해놓은 그 날 말고는 잔여석이 없다. 이제 진정한 선택의 시간이다.
선택 1. 그냥 원래 계획대로 뉴욕 여행을 하고, 링컨센터 공연도 보고, 시카고 미술관은 다음 기회에 간다.
선택 2. 뉴욕 IN이 아닌 시카고 IN으로 여행 일정을 변경하여 시카고 미술관에 가고, 링컨센터 공연 티켓은 날린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누가 봐도 1번이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그렇다. 2번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감수해야 할 손해도 없다. 그렇지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 마음은 1번으로 기울었다는 뜻이다. 애초에 '뉴욕에 이렇게 길게 가는데 링컨센터에서 공연 한번은 봐야지'라는 마음으로 연주자도 연주곡도 잘 모르면서 예약했던 공연이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또 졸다 나오는 것 아닌가 내심 걱정도 됐었다. (그럴 거면 왜 예약했대) 공연 티켓을 날리지 않을 방법이 도저히 없어서 속이 좀 쓰리지만, 이번 기회에 시카고 미술관에 가는 편이 훨씬 더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자, 이제부터 링컨센터 공연 티켓 값은 흐린 눈 하고 기억 속에서 지워야 한다. 레드 썬!
인천 출발 시카고 도착 항공권,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가는 항공권, 시카고 숙소의 예약과 기존 뉴욕행 항공권 취소, 뉴욕 숙소 일정의 변경까지 오늘 하루만에 완료하고 나니 문득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이건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내가 어떤 인간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달까.
누가 보면 돈이 아깝지도 않냐,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게 나란 사람이다. '나중에'라는 건 내 인생에 별로 없다. 그냥 나는 모든 걸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지금'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갑자기 지구 종말이 온다고 해도 특별히 '이것도 저것도 못해봤는데 이렇게 죽는다니 억울하다'는 생각도 안 들 것 같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성향이 강해지고 또 점점 더 과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래서 내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걸 느낀다.
'살면서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했던 아름다운 곳들에 나는 기어코 돌아갔고, 또 '살면서 갈 일이 있을까' 생각했던 머나먼 곳들에도 나는 이윽고 발을 내디디고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그림, 강한 이끌림, 그리고 약간의 흐린 눈이면 이 세상에 가지 못할 곳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