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소설 <공무도하>를 겨우 다 읽고
나는 김훈의 문장에서 필연적으로 기자라는 직업을 떠올리곤 한다. 문장에서 모든 군더더기들을 솎아내는 일은 어쩌면 대학 시절 내내 내게 가장 낯설고도 중요했던 작업이기도 했기 때문일 거다. '기사'라는 걸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내 문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툭하면 주어가 실종되며 온갖 수식어와 허세가 가득하다는 걸 깨달았다. 김훈의 문장에서는 그런 군더더기들을 솎아내는 일에 대한 강박(혹은 습관)이 느껴지곤 한다. 지독하게 간단한 문장으로 무수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던 것도 김훈의 문장에서다. 그리고 사실에만 의거하여 쓰는 기사가 어째서 사실이기만 할 수 없는지에 대한 김훈의 고뇌나 탄식같은 것들이 좋았다. '자신의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줄도 쓸 수 없다며 연필로 글쓰기를 고집하던 김훈의 아날로그적 감성이 좋아서, 회사 입사시험 때도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쓰라는 문제에 김훈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썼던 것 같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김훈의 소설이 재미 없다고 생각한다. 밥벌이의 지겨움과 자전거 여행을 거의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던 내가 칼의 노래, 현의 노래의 내용은 기억도 하지 못하고, 공무도하, 내 젊은 날의 숲은 읽다 말고 던져놓은 이유는 말이다. 솔직히 재미가 없어서다. 오래전에 읽다 만 공무도하를 마저 읽으면서도, 소설적 재미보다는 자신이 오랫동안 속해 있었던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김훈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ㅡ주인공의 직업이 기자여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ㅡ 포기하고 싶은 욕구를 눌러가며 꾸역꾸역 끝까지 읽어냈다. 내 젊은 날의 숲이나 흑산에 대한 기대도 사실 크지 않다. 이건 실망같은 것이 아니다. 김훈의 소설이 어떻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의 책은 앞으로도 계속 사고, 또 재미없다며 읽다 말기를 반복하고, 하지만 또 지금처럼 언젠가는 꾸역꾸역 끝까지 읽어내고 말 거다. 김훈의 문장은, 김훈같은 문장으로 쓰여진 소설은, 그럴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부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부재하는 것은 아니고, 그 반대도 또한 아니다. 존재와 증명 사이에 상관관계나 인과관계가 있다는 전제도 증명되기 어려운 것이지만, 증명되지 않는 것들의 실체를 긍정할 수 없는 것이 과학의 고충이다. 이해를 바란다.
기름을 먹은 붓으로 캔버스를 칠할 때 붓끝에서 손목과 어깨로 달려드는 기름의 질감은 여전히 버거웠다. 몸이 기름 속으로 녹아들지 않았고, 기름이 몸과 붓 사이에서 미끈거렸다. 노목희는 기름으로 그리기를 포기했다. 노목희는 수채 색연필로 그렸다. 색의 층을 겹쳐서 색과 색 사이의 구획을 지우고 그 위를 젖은 붓으로 문질렀다. 색들은 물러섰다. 색들은 구도의 뒤쪽으로 밀려나면서 저물었고, 저무는 자리에서 다시 동터왔다.
색들은 물러섰다.
이 한문장 앞에서 한참을 멈춰서 있었다. 나는 이래서 김훈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