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이 해피엔딩>을 읽은 어느 새벽에 쓴 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에는 나름의 공통점도, 또 저마다의 차이점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내 취향의 문제와는 별개로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과연) 분류가 가능한 지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 작가가 쓴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 에 대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소설은 잘 쓰지만 에세이는 제발 넣어둬 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작가(예를 들어 채소의 기분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두 개의 달이 뜨는 1Q84년ㅡ혹은 1985년ㅡ에 대한 이야기나 끝까지 해보라며 멱살 잡고 싶은 그 분)와 에세이는 최고지만 소설은 조금, 음, 하게 만드는 작가(예를 들어 밥벌이가 지겨워 자전거 타고 떠난 여행에서 쏟아낸 문장들로 파릇파릇하던 20대 초반의 나에게 거의 절망에 가까운 경이감을 느끼게 해준, 하지만 역사에 약한 나에게 주구장창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만 내밀어 나를 무참하게 만든 그 분), 그리고 소설만큼은 아니어도 에세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작가(예를 들어 채식을 하고 희랍어를 구사하며 바람이 불면 어디든 갈 것 같은 그 분), 라는 식의 분류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도 안 되게 긴 문장을 써놓고 나니 갑자기 무참해졌다. 그리고 문득 내가 아직 김훈의 '화장'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뒤늦게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비롯하여 총 8권(전자책 4권 포함)의 책을 샀다. 8권을 샀는데 5만원이 안 된다. 아름다운 밤, 아닌 새벽이다.
그러니까 왜 신새벽에 잠 안 자고 무참해져가며 저 기나긴 문장을 썼느냐 하면, 김연수와 김중혁의 조합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놓고는 책장 어딘가에 쳐박힌 채 잊혀졌던 책 <대책없이 해피엔딩>을 빛의 속도로 다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김연수 찬양을 하기 위해서다. ㅡ물론 이 책에서는 김중혁도 결코 나무랄 데 없는 개그를 선사하였지만ㅡ
소설을 읽고 반한 작가, 그 작가가 쓴 에세이를 읽고 진짜 좋다 라고 느낀 적은 별로 없다. 그냥 나쁘지 않다 정도가 아니라, 그 작가의 소설만큼이나 '진짜 좋다'라고 느끼는 것 말이다. 물론 그 사람이 쓴 소설과 에세이를 모두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작가가 그리 많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그냥 좁디 좁은 내 개인적 취향과 포용 가능 영역 안에서의 이야기다. 극히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소설이 좋을 경우 그 작가의 '글'이 좋은 거지만, 에세이가 좋을 경우 나는 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엄청난 일반화의 오류이자 가당치도 않은 궤변이라며 비웃어도 할 말은 없다. 그리고 여기서 '그 사람이 좋다'라는 표현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올바른 사람이다, 보다는 내 취향의 사람이다, 라는 뜻에 가깝다.
아무튼 김연수가 쓴, 소설이 아닌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점점 김연수에게 빠져든다. 어쩌면 이 책에서 김중혁이 쓴 다음의 문장이 내가 김연수를 갈수록 더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안다. 그런 시간이 있었으니 이렇게 가벼워질 수 있었다. 선배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혼나고), 후배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받고 (혼내고), 온갖 고민을 혼자 짊어져본 뒤에야 가벼워질 수 있었다. 온갖 고민을 혼자 짊어져본 뒤에야 가벼워질 수 있었다. 가볍다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이젠 적어도 목을 매지는 않는다. 사람에 대한 생각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가벼운 척하면서 무거운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어도 무거운 척하면서 가벼운 사람은 곁에 두고 싶지 않다."
기본적으로는 나는 진중한 글이 좋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볍게 농담할 줄 아는 사람일 때, 개그감까지 있을 때, 나는 이미 그 사람의 노예다. 어쩔 수가 없다. 이 책에서 김연수 본인이 뻔뻔하게, 혹은 김중혁이 상당히 우려를 표하며 말한 것처럼 그가 한때 문단의 3대 미남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절대.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이 뻔뻔한 두 남자의 개그빨과 글빨에 몇 번이나 빵 터졌는지 모른다. 씨네21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건데 역시나 우려한 대로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 게 거의 없지만, 이 책은 김연수의 팬이라면 반드시 소장해야 할 책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읽으며 봐야 할 영화 목록도 업데이트되긴 했다. 폴 오스터가 각본을 쓴 <스모크>와 보다 말았던 <더 리더>,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ㅡ김연수가 강간범으로 출연했다는ㅡ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니까 결론은, 코언 형제의 철자는 시, 오, 이, 엔, 이라는 거다. 문득 엠넷 면접 때 슈퍼주니어 멤버 13명의 이름을 땀 뻘뻘 흘리며 외쳐댔던 게 떠오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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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그러니까 1995년 무렵에는 너나 할 것 없이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으니, 또 너나 할 것 없이 비평가였다. 책이면 책, 영화면 영화, 인간이면 인간, 걸리는 족족 서슴없이 "쓰레기"라는 평가가 나왔다. 청년실업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친구들이 술 마시러 나오라는데 차비가 없어서 못 나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할 일이 있다고 둘러대던 시절이니 뭐가 두렵겠는가. 하지만 할 일이 있어서 술 마시러 못 나간다니, 그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
외국에서 지내다보면 아주 간단한 법칙을 하나 알게 되는데, 그건 정색하면 제아무리 많은 돈을 들였더라도 그 여행은 실패라는 점이다. 음식이 나왔는데 정색하면 지는 거다. 식은땀이 흘러나와도 웃으면서 먹는 사람이 승리의 여행자다. 지하철역에서 올라왔더니 동서남북 구분이 안 된다고 정색하면 역시 지는 거다. 등골이 오싹해도 일단은 돌아갈 지하철역은 알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만 한다. 제아무리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한들 정색하고 서 있으면 현지인들은 호칭부터 다르게 부른다. 그러니까, 사장니임.
조언하자면 그냥 대충 살아요. 따지지 말고. 괜히 싫은 사람 찾아가서 싫다고 소리 지르지 말고, 상처 주는 인간들 앞에서 상처 헤집어 보여주지 말고.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마음에 든다면 마음껏 부를 것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 않습디다. 대충대충, 부르게 됩디다. 지금 저는 김범수의 노래를 벌써 여섯 번째 듣고 있습니다. "너 때문에 못 쓰게 된 나라고"라며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를 지경이군요. 이 여름도 그렇게 몇 번을 반복재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세 번째 재생될 때쯤이면 우린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면 되는지. 하지만 인생이 재활용되는 거 본 적 있습니까? 우리 앞의 인생은 늘, 언제나, 만든 지 사흘 정도가 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니까 다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우왕좌왕 좌충우돌의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본디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민남(39, 일산 변두리 거주)의 솔직한 고백처럼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싫으면 싫다고 소리 지르고, 상처를 받으면 꼭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기적이라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할지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김범수가 고민남에게 답합니다.) "너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너 때문에 못 쓰게 된 나라고, 바보처럼 너를 미워할 핑계를 찾곤 했"던 시절이 다들 있었겠지만, 그렇게 말할 때조차도 우리는 그녀를 정말 미워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따지지 말고, 일단 살아요. 나중에 다 알게 될 거니까.
(중략)
누군가가 어떻게 살면 좋겠느냐고 물을 때마다 대충 대답합니다만, 몇 년에 한 번 우연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들을 때마다 저는 잘사는 방법이 뭔지 알 것만 같습니다. 사물에 담긴 추억으로 우리는 같은 인생을 여러 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로써 디테일이 왜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그토록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일들이 이런 식으로 재활용되는 것이라면 (딱히 고민남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폐품 인생한테도 구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너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욕하지 맙시다.
현실감을 잃어버렸던 지난 십 년, 다시 <그랜 토리노>를 보면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한다. 평생 꿈을 말하며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날 현실적으로 죽는 일에 대해서, 역설적이게도 그 현실적인 죽음은 우리에게 다시 꿈에 대해서 서로 얘기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만 나는 <그랜 토리노>의 마지막 장면만을 하염없이 보는 것이다. 나뭇잎은 흔들리고 물결은 출렁이고, 어떻게든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게 좀 놀라워서.
찾아갔더니 작은외숙모가 신문을 보여줬다. 하나는 그 선생님이 <김천신문>에 쓰신 서평. 다른 하나는 신문에 실린 작은외숙모의 시였다. 신문에 실린 사진과 이름을 보고 나서야 나는 어린 시절 거의 매일 작은외숙모를 만났지만, 그 분의 이름을 모르고 지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 시를 쓴다는 건 작은외숙모에게 자기 이름을 찾는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가 참 좋다. 그분이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라는 건 소리와 빛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 일부분도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다. 낭만주의자가 될 때, 나는 일상의 소리와 빛에 민감해진다. 비행기 소리라거나 바람 소리, 혹은 도로로 흘러내리는 빗줄기에 되비치는 거리의 불빛들에 나는 끌린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자는 일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비 내리는 청두 거리라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센티멘탈해진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서도 그처럼 센티멘탈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바라보는 일상은 너무 큰 소리와 아름다운 빛으로 왜곡돼 있다. 그리고 이 왜곡은 의도적이다.
"연수 씨 작품에는 신파가 있어요"라는 말을 지난주에 들었다. 항변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통속을 좋아하고, 신파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통속과 신파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감추는 데 실패한 자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