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허리를 쭉 펴고 좀 빨리 걸어봐.”
“숨이 차서 그래.”
“네가 좋아하는 명태전이랑 호박전 부쳐 놨어. 갈 때 가져가.”
“아냐, 아냐,가져가야 잘 먹지도 않아. 추석 때 싸준 전이 냉동실에 그대로 있어.”
“밑반찬 뭐 해줄까?”
“됐어. 힘드니까 놔둬. 사서 먹으면 돼.”
“이 국그릇, 내가 예전에 도자기 전시장에 갔다가 마음에 쏙 들어서 산 건데 너 가질래?”
“내 취향이 아냐.”
연휴 내내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엄마가 뭔가를 권유하고 청하면 불쑥 부정적인 대답이 튀어 나왔다. 어떻게 마늘을 넣지 않고 돼지고기를 볶았느냐며 밥상 앞에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표정과 말투가 뻣뻣해졌다. 언제부턴가 지나치게 몸을 사리고, 필요 이상으로 아끼려 들고, 점점 속이 좁아지는,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엄마를 대할 때면 나도 모르게 삐딱해졌다.
어둠이 내리고, 어김없이 트롯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는데 엄마가 “유자차 줄까?” 하고 물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먹을래, 저거 먹을래, 하면 즉시 “아니” 라고 대답하는 딸이 웬일로 유자차를 마시겠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았는지 엄마의 몸에 탄력이 붙었다. 연노란 빛깔의 유자차가 내 앞에 놓였다. 엄마도 두 손으로 머그잔을 쥐고 있었다.
“달지 않고 뒷맛이 개운하지? 이걸 마시면 속이 편안해져.”
“검색해 보니까 유자차가 엄마한테 좋네. 뇌혈관 질환이나 고혈압을 예방해 준대.”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유자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입안에 감도는 유자 향기가 머릿속까지 맑게 해줬다.
“껍질 안 먹어?”
유자차를 다 마시고 나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는데 엄마가 말을 걸었다.
“껍질을 왜 먹어?”
“유자 껍질이 얼마나 쫄깃쫄깃하고 맛있는데. 먹어 봐.”
“배불러.”
“아깝게 그걸 왜 버려. 한 번 먹어봐.”
“싫다니까? 무슨 유자 껍질까지 먹으래?”
우리의 대화가 멈췄다. 일분, 이분, 삼분…… 내가 유자 껍질을 먹나, 안 먹나 살피는 엄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짜증이 내 마음속에 먼지처럼 내려앉았다.
“껍질 안 먹을 거면 이리 줘. 내가 먹게.”
“왜 남의 컵에 있는 껍질까지 먹으려고 그래?”
입 안에 꾹꾹 담아둔 말화살이 날카롭게 날아갔다. 분위기가 대번 가라앉았다. 어디선가 무엇이 팡! 하고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지는 공기였다. 예전 같으면 엄마가 바로 되받아쳤을 텐데 숨만 쌕쌕 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꾹 참고 있다는 걸 내가 왜 모를까. 티브이에서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꿈을 찾아 상경했다는 참가자가 ‘이렇게 살라고 인연을 맺었나’ 하면서 애절한 눈빛으로 열창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깨어 거실로 나갔다. 유자차가 일으킨 어색함을 피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한숨이 나왔다. 거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거실에서 잠든 엄마의 모습은 확연히 보였다. 엄마는 모로 누워서 이불로 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순간 무덤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어 얼른 시선을 피하는데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수첩이었다. 나는 소파 구석에 놓여 있는 그것을 살짝 집어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 돋아나는 글자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찌릿했다. 073 오시앤, 136 전원일기, 109 미스터 트롯, 091 국민가수, 096 K. 스타, 110 용감한 형사, 047 싸인, 054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는 나보다 더 티브이와 거리가 멀었다.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5년 전 석가탄신일 아침, 엄마는 욕실에서 어지럼증으로 쓰러져 뇌출혈을 일으켰다. 뇌 손상으로 인한 과다 출혈, 그럼에도 기적적으로 소생한 엄마. 함께 병실을 쓰던 어떤 할머니가 그랬다. 하늘이 엄마를 받아 안았다고. ‘하늘이 도왔다’는 표현보다 더 감격스러운 말, 하늘이 받아 안았다. 그 후 엄마의 육신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스스로 밥을 짓고, 몸을 씻고 청소를 하고, 산책을 했지만 어디 다니는 걸 힘겨워 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만 있게 됐고, 또 그러다 보니 누구와 만날 일이 없었다. 본의 아니게 외톨이가 된 것이다. 그 긴긴 시간을 텅 빈 집에서 혼자 무얼 하며 보낼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마음이 무거워져서 엄마의 외로움을 애써 외면했다.
엄마가 또박또박 써놓은 글자들을 한참 쳐다봤다. 최근 통신사를 바꿨는데 즐겨보던 프로의 채널 번호가 달랐던 모양이다. 전에 통신사는 78번에서 ‘전원일기’를 했는데 새 통신사는 136번에서 방영하는 식으로. 미스터 트롯은 백구 번, 용감한 형사는 백십 번, 케이스타는 구십육 번…… 리모컨을 눌러가며 수첩에 프로그램과 채널 번호를 적는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엄마는 적막한 집에 푹 잠겨 이렇게 세상과 소통했구나. 전원일기, 국민가수, 싸인, 용감한 형사, 불타는 트롯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가 엄마의 절친한 친구들이구나. 매일 이 친구들을 만나서 웃고, 울고, 분노하고, 즐거워했겠구나…… 나는 엄마의 친구들이 새삼 고마우면서도 왠지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수첩에 새겨진, 맥박이 뛰는 듯한 엄마의 필체를 만져보는데 내 안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고향집에 내려갈 때마다 엄마를 상대로 크게 선심을 쓰듯 속으로 말하는 며칠 더 ‘있어 주자’, 함께 티브이를 ‘봐주자’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훗날 알게 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