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by 김설원

어릴 때 아버지의 일터를 따라 이 도시 저 도시로 전학을 갔어요. 꼭 봄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때 그 불만스러운 이주가 행해져서 새해가 밝아도 기쁘지 않았죠. 낯선 공간이 안겨주는 불안과 외로움을 견디기가 힘들어서요. 그 시절에는 점심 도시락을 챙겨서 등교했는데, 이삿날이 정해지면 ‘이번에 전학 가는 학교에서는 누구랑 점심을 먹지’ 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어요. 처음에는 어색하니까 서로 선뜻 다가서지 않잖아요. 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으면서 혼자 앉아 있는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것 같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밖에서 혼자 밥을 못 먹어요. 생각해 보면 잦은 전학이 책과 저를 이어줬어요. 책을 가지고 다니거나 어디에 펼쳐 놓으면 마음이 편해졌거든요. 속이 깊고 잔정이 많은 친구가 내 손을 꽉 잡아주는 기분이랄까.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부모님이 크고 작은 고비를 힘겹게 넘기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절망과 슬픔의 적설량이 점점 많아졌죠. 하지만 그런 간접적인 경험이 문학적 감수성을 키우는데 큰 도움을 준 것 같아요.


책을 읽고 글을 쓸수록 역시 작가들이 가장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해요. 독자들의 머릿속에 새겨지는 어떤 문장이나 장면을 만들어 내기까지 고뇌의 폐달을 밤낮 밟았을 테니까요. 지금 이 순간 작가들이 세상에 내놓은 작품 가운데 <문학과 음악이 이야기한다>(오에 겐자부로‧오자와 세이지 지음, 정회성 옮김)와 <비둘기>(파트리크 쥐스킨드 지음, 유혜자 옮김)가 떠오르네요. <문학과 음악이 이야기한다>는 1935년생 동갑내기 두 거장의 대담집이에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와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가 예술론과 교육론에 대해 깊은 사유를 펼쳐 보여요. 다채로운 경험에서 얻은 삶과 예술에 대한 통찰이 빛나죠. 좌담 중에 오에 겐자부로가 이런 말을 들려줘요.

“회사도, 소사이어티도, 조직도, 심지어 국가도 중요하지만, 저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인간의 가치는 결국 개인에게 달려 있죠.”

“에너지의 원천은 의외로 단순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이성에 대한 욕망, 먹고 싶은 욕구, 먹고 살려면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 같은 데서 생기는 게 에너지 아닐까요? 그런데 갈수록 그런 것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기본적인 욕망이 없으면 인간의 삶은 황폐해져요.”

<비둘기>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가벼운 장편소설이에요. 어느 은행의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50대 조나단이 주인공이죠. 세상에 대한 불신과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옹색한 방을 유일한 은신처로 삼는 인물이에요. 어느 날 그의 방 문 앞에 나타난 비둘기, 그것에 공포를 느끼면서 심리적으로 쫓기는 조나단의 겉과 속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묘사했어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조나단의 심리에 빠져들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조나단이 비둘기로 인해 세상에 맞설 용기를 얻는 모습을 보면 어떤 충만함이 제 안에 가득 차올라요.


니체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주눅 들지 마!” 아닐까요?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믿고 진흙구덩이를 헤쳐 나가자. 저는 학생들에게 소설을 가르칠 때 ‘어느 날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를 줄기차게 강조해요. 어느 날 나에게 찾아온 ‘무슨 일’, 그로 인한 화자의 육체적‧정신적 동선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라고 말하죠. 한마디로 주인공이 ‘무슨 일’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학생들의 습작소설을 보면 대개 그 ‘무슨 일’이 희미해요. 아예 없기도 하죠. 때문에 지루하게 과거 이야기만 늘어놓는 거예요. 문학에서 비극은 ‘성장’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청소년이 등장하는 소설을 대개 성장소설이라고 부르는데, 저는 현대소설 자체가 성장소설 같아요. 우리는 누구나 미성숙한, 외로운 사람들이니까요.


‘가족이 희망이다’ ‘가족이 최후의 보루다’

흔히 입에 올리는 이런 말들에 의구심이 들곤 해요. 과연 그럴까. 가족이라는 건축물은 의외로 쉽게 붕괴되는 것 같거든요. 부모자식 간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가급적 투명하게 보여줘야 하는데 보통 어두운 면은 숨기려고 하잖아요. 그러다 지뢰를 밟은 것처럼 무슨 일이 터지면 서로를 원망하거나 증오하기 바쁘죠. 결국 남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 버리고요. 그러니까 우리 가정이 어떤 레일 위에서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가족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해요. 서로에게 솔직할 때 가족애가 두터워진다고 믿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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