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일생인데 무거울 수밖에 없지요"

by 김설원

오래 전 대학에서 시를 가르쳤던 은사가, 내 삶이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 김수영의 <봄밤>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저음의 목소리로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를 천천히 읊조렸다. 은은한 향기를 머금은 <봄밤>이 저절로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날 이후 내 삶이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고, 그 허무의 골방에서 뒤척일 때마다 문학적 의사의 처방대로 <봄밤>을 입으로, 또 머리로 만지작거렸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발끝에 힘을 주게 되면서 ‘그래 서둘지 말자, 다시 해보는 거다’ 이런 배짱 비슷한 감정이 오돌토돌 돋아나곤 했다. 이런 인연으로 내게 김수영은 <풀>이 아니라 <봄밤>의 시인이다. 그 시절 우리는 김수영의 시와 산문이 담긴 묵직한 책 두 권을 들고 매주 강의실에 모였다. 누군가가 무거운 책을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농담처럼 입에 올리자 은사가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의 일생인데 무거울 수밖에 없지요”, 무언의 탄성이 강의실 가득 피어올랐다.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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