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었으나 죽지 않은 사람
예루살렘 입성
그동안 의식적으로 공권력을 피해 다녔던 예수는 이스라엘이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축제 기간에 돌연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이 시기를 유월절 또는 해방절이라 번역합니다. 로마의 식민지 처지인 이스라엘이 해방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내니 정치적인 긴장감이 돌지 않을 수 없는 시기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은 순례자들이 대거 몰려들어 일촉즉발의 상황이 해마다 벌어지곤 했습니다.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녁을 관할하는 총독은 자신의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와 있었으며, 로마의 기병대대도 주둔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메시아를 자처하는 민중 지도자가 주도한 소요가 일어나면 로마의 부대가 이를 진압했습니다. 이렇듯 비상계엄령 체제가 발동한 때에 예수가 올리브산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그를 따르던 무리와 순례자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왕의 즉위식을 연상케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의 나라가 온다"는 말은 예수를 왕으로 받아들여 환호한다는 뜻이며, 종려나무란 개선장군이나 임금의 승리를 환영하고 찬양할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특히 무리는 예수가 나아가는 길 앞에 겉옷을 벗어 깔았는데, 이는 즉위식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메시아가 타고 있는 나귀는 이민족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유대인에게는 판관과 예언자들이 다스리던 이스라엘 초기 평등사회의 지도자들을 연상케 하는 동물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내가 바로 너희의 왕이다. 메시아가 다스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에 와 있다." 하고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는 당연히 로마의 공권력을 정면으로 자극하는 행위였습니다.
성전 정화
예루살렘 입성 다음날, 예수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환전 업무, 제물용 짐승 판매 등을 하는 장사꾼들에게 다가가 상을 뒤집어 엎으며 장사를 못 하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독교에서는 '성전 정화'라 부릅니다. 성전 안 장사꾼들은 예배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온 이른바 공식지정업체 사람들입니다. 제사에 쓰일 짐승, 화폐 따위를 독점판매하니 가격 횡포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총독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전 헌금을 종교적 행위로서 허용했고, 이 자금을 사두가이파인 대사제들이 관리했습니다. 중앙의 사제들은 이런 수입으로 대토지를 마련한 주지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가 '강도의 소굴'이란 표현을 쓴 데에는 이러한 내막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마음이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지배올로기로 작용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라 불리우는 예수는 이미 물세례를 유행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중요한 수입 통로를 막고 있었습니다. 제물에 쓰이는 짐승을 팔지 못하게 하고 환전을 방해하는 일은 기득권 세력을 향한 공공연한 도전이었습니다. 더우기 축제 기간은 커다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로마 제국 입장에서도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대사제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로마 황제와 로마인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예배를 하루 두 번씩 드렸습니다. 대사제 또한 로마 당국의 허가를 통해 임명이 되었으니 그들은 혈통만 유대인이었을 뿐 제국의 꼭두각시이자 매국노였습니다. 사제복조차도 총독이 관할하여 공식제의 때에만 받아 입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치욕적인 제사 행위는 예수가 죽고 나서도 30년 넘게 지속되어 AD 66년에 민중봉기를 통해 중단되었습니다.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은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길 없지만, 성전의 재건과 회복이라는 상징성만큼은 매우 컸습니다. 예수는 군중의 지지를 받으며 성전 정화를 수행했을 것입니다. 성전의 치안을 담당한 로마의 경찰들이 긴급하게 소요 사태에 끼어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대적인 민중 봉기로 발전할 만한 규모는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야말로 예수가 체포되어 죄인으로 판결받고 궁극에서는 처형당하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예수의 적들은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을 엮음으로써 드디어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고소할 명분을 얻었습니다. "국가를 전복시키고 카이사르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왕이라고 한다."(루가 23:2) 식민지의 존경받는 윤리 선생이 아니라 봉기의 중심 인물인 유대인이 받드는 왕으로 존재감이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나무 형틀
이스라엘 역사에도 나무에 사람을 매달아 처형한 기록(여호수아, 에스더 등)이 있지만, 예수 당시에 유대인이 죄인을 공개적으로 처형할 때 사용한 방식은 돌로 치는 것이었고 나무에 매달 때는 이미 죄인이 죽은 뒤였습니다. 로마는 노예, 이방인, 반역자, 살인범 등을 처형할 때 나무 형틀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시대는 민중의 반란이 워낙 잦은 시절이라 군중에게 과시 효과가 있는 나무 형틀이 자주 쓰였다고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신성모독죄인이 아닌 로마의 정치범으로서 처형당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율법에도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신명기 21:23)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나무 형틀에 매달린 채 죽은 예수는 누가 보더라도 저주받은 죄인이자 패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민중은 패배의식에 빠져 절망했고 로마와 대사제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었습니다. 마지막 만찬과 죽음이 부활신앙을 만나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 새로운 운동이 바로 '교회의 성립'입니다.
모든 사람의 왕
교회는 유대인의 왕으로 죽은 예수가 모든 이의 왕으로 다시 살아났음을 믿고 선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과 로마 양쪽 모두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생겨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포기하고 로마가 죽이자 그는 어느 하나의 민족의 왕이 아닌 모든 사람의 왕이 되는 운명으로 나아갑니다. 죽었으나 죽지 않은 사람!
※ 이 시리즈는 전자책 <성경을 읽었습니까?>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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