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이 영원한 클래식이듯 우리의 사생활도
송도기생 황진이의 사생활은 만고의 고전인데 신인가수 백모양의 사생활은 왜 통속이고 지랄이야. 내가 보긴 황진이는 불륜이고 백모양은 연애인데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가을밤 황국 같은 황진이도 좋고 봄밤의 백합 같은 백모양도 좋은데 좋기만 한데 왜! 이 시대엔 벽계수를 대신해 줄 풍류남아가 없고 지랄이야. 명월이 만공산 할 제 달빛 아래 휘영청 안기고픈 사나이가 없고 지랄이야. 아,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운 길 어이타! 이 몸과 더불어 유장하게 한 번 뒤척여 볼 박연폭포 같은 사내가 없고 지랄이야.
봄밤은 고전인데
이화에 월백하는 봄밤은
만고강산의 고전인데
고교 시절 국어 시간에 접했음직한 시조를 한 번 읊어보자.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말 문신 이조년의 시조이다. 일명 <다정가(多情歌)>로 현대어조로 풀면 이렇다.
“배꽃에 비친 달빛은 희디희고 밤하늘을 흐르는 은하수는 유장한데 우듬지처럼 홀로 뻗어 외로운 내 심사를 두견새는 알아 지저귀는지 모르고 지저귀는지. 잠 못 드는 밤에 마음에 쌓인 정만 한 가득이다.”
시인은 지금 어떤 뉴스를 보고 혀를 끌끌 찬다. 노래 잘하고 얼굴도 예쁜 신인여가수가 예전 남자친구와 함께 춘정을 불사른 흔적이 동영상으로 남아 세상 사람들의 눈요기가 되었다. 동영상을 배포한 나쁜 놈은 여가수의 헤어진 남자친구. 화가 나는 대목은 여가수가 제일 큰 피해자인데 설왕설래 욕도 제일 크게 먹는단다. 자칫 가수 생명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른단다. 아니, 이 무슨 이런 X같은 경우가 다 있나!
조선시대에도 백모양처럼 노래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시문까지 능한 황진이가 있었고, 그녀의 사생활에 비하면 이 신인여가수 동영상의 정사씬은 댈 것도 아닌데도, 누구 하나 황진이를 욕하는 사람은 없다. 욕은커녕 그녀가 남긴 일화마다 작품마다 역사요 고전이다. 황진이의 사생활이 풍류면 미혼 여성 백모양의 사생활은 연애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곳저곳에서 희번덕거리는 관음의 눈빛과 수군거리는 음색이 다만 찌질하고 찌질할 뿐이어서 절로 욕이 나온다. 다들 참 지랄이셔!
인생은 큼지막한 바다요, 이 바다 한번 아주 건너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데, 이놈의 세상에는 황진이의 후예인 젊은 여성 시인이 그 너른 가슴에 폭하니 안기고픈 사내는 보이지 않고 지질한 사내놈들만 잡풀처럼 무성하니 절로 탄식이 나온다. 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욕하고 탄식하던 마음으로 다시 밤하늘을 쳐다보자니 배꽃 냄새 흐드러지고 달빛 교교한 봄밤이 진정 만고강산의 클래식이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풍류보다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연애보다도 배꽃나무 위에 달이 휘영청 밝은 지금 이 시간이 클래식이다. 사람아, 사람아, 내 사생활이 소중하듯이 남의 사생활도 귀히 여겨라. 거기 풍류도 있고, 거기 참된 연애가 있다.
(유용선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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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이런 시' 하단에 있는 이미지는 해당 시가 수록된 시집의 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