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대체 직업다운 직업이 뭘까
봄날,
나무벤치 위에 우두커니 앉아
<Job 뉴스>를 본다.
왜 푸른 하늘 흰 구름을 보며 휘파람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 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소풍 온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놀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비둘기떼의 종종걸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뭇잎 사이로 저며 드는 햇빛에 눈을 상하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무벤치에 길게 다리 뻗고 누워 수염을 기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40억 인류의 Job이 될 수는 없을까?
장정일의 시편 가운데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 이 시가 처음 수록된 지면이 어디였는지는 잊었다. 2005년 끼적거린 일기에 다른 사람한테 읽어보라고 추천한 흔적이 있다. 지금은 2018년 열림원에서 묶은 시선집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3부에서 다시 대면한다. 이 시집에 남긴 '시인의 말을 대신하여'의 마지막 세 문장이 퍽 인상적이다. "스님이 그냥 스님이듯 시인은 그냥 시인이다. 제 좋아서 하는 일이니 굳이 존경할 필요도 없고 귀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시나 모국어의 순교자가 아니라, 단지 인생을 잘못 산 인간들일 뿐이다."
Job의 발음이 연상시키는 '잡(雜)스러움'과 Job의 뜻인 '직업'과 Job의 첫 글자를 전부 대문자로 쓴 점(성경에 등장하는 인내의 화신 ‘욥’의 영문 이름이 Job)과 그가 한때 제법 좋은 평판을 얻었던 시인이었다는 점과 시인은 직업일 수 없다는 점과 요사이 소위 시라 일컬어지는 것들이 꽤 잡스러워졌다는 등 여러 가지 생각들 속에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내 눈은 번번이 위아래로 피드백을 한다.
그가 저 시를 썼을 때 40억대였던 인구는 21세기가 되기 직전인 1999년에 60억을 넘어섰고 지금은 70억을 넘어섰다. 그 사이 저런 Job 가진 사람 하나쯤 생겨났을까? 저렇게 사는 사람을 한량이라 하는데 세상은 한량을 직업으로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운가? 한량의 대표격이 시인, 화가, 작곡가 등속일 텐데 세상은 그러한 Job을 참을성 있게 대해줄 수 있는가?
글로만 먹고 살아보겠다는 호기로운 실천을 2년도 안 되어 포기한 적이 있다. 그때조차 나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비단잉어, 비둘기떼, 나뭇잎 따위가 아닌 밥벌이 원고 쓰기와 글쓰기 강좌 따위를 더 자주 쫓아다녔다. 그 후로도 집필과 거기서 나오는 수익만으로 생활한다는 꿈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저와 같은 생활을 소위 Second Job인 양 가끔 실천할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감지덕지다.
여섯 번에 걸친 질문 “왜 Job이 되지 않는가?”는 가끔씩이라도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 연에 던진 일곱 번째 질문 “이런 것들이 Job이 될 수는 없을까?”는 결국 이런 것이 진짜 직업다운 직업이요 사람다운 삶이 아닌가 자문한다. 세계 인구 전체를 들먹이는 심사가 거기 있다. 엿새에 세상을 다 창조하고 이레에는 쉬었다는 창조주의 심사라도 되는 양 일곱 번째에는 기어코 그리 묻고 마는 것이다.
(유용선 記)
* '오늘은 이런 시' 하단에 있는 이미지는 해당 시가 수록된 시집의 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