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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Aug 31. 2019

요한과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

핍박당하는 백성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란 뜻으로 본래 왕실 용어입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먼저 생겨난 것으로 알려진 마르크의 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이상 뒤에 편집된 마태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을 기록합니다. 또한 서기 90년에서 100년 사이에 기록된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를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존재로 서술합니다. 마르크의 복음서가 실존한 예수의 언행을 기록하는 데 충실했다면, 마태와 루가의 복음서는 초대교회의 입장에서 본 예수의 삶을 기록하려 했습니다. 요한의 복음서는 완벽하게 신앙의 대상이 된 예수에 대한 영성적 기록입니다. 예수 어록, 마태의 수집 자료, 루가의 수집 자료 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정리되어 모두 복음서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밖에도 토마(토마스)의 복음서, 야고보의 복음서, 필립의 복음서, 이집트인들의 복음서 등이 있는데, 이 문서들은 정식 경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해서 외경(外經)이라 부릅니다. 




  예수 탄생 당시의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의 이두매 사람 헤로데를 유다의 왕으로 임명했고, 헤로데 가문은 로마의 앞잡이로서 대를 이어 충성을 다했습니다. 헤로데는 예루살렘 성전을 개축하고 극장을 건설하고 수로를 건설하는 등 유다 귀족층의 환심을 사 어느 정도 합법성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군대를 유지하는 데 많은 돈을 들였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궁전에 수많은 후궁을 들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그 모든 재정은 당연히 백성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은 누구든(아내, 장모, 자식조차) 투옥하고 고문하고 살해했습니다. 야욕과 허영으로 가득 찬 헤로데의 통치 아래에서 이스라엘 민중은 다윗처럼 자신들을 해방시킬 새 임금 곧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베들레헴의 인구 조사> (피터르 브뤼헬)

  마태의 복음서 저자는 예수 탄생을 헤로데 대왕 통치 말기로 봅니다. 헤로데를 피해 베들레헴으로 간 예수의 부모가 그곳에서 예수를 낳고 헤로데가 죽은 직후(기원전 4년)인 아르켈리오 시대(기원전 4년에서 서기 6년)에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에서 돌아와 나사렛에 정착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반면, 루가의 복음서 저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으로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가 시행한 제1차 호구조사 때 요셉이 거주지인 나사렛을 떠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예수를 낳았다고 기록했습니다. 퀴리니우스의 재임기간은 서기 6, 7년입니다. 두 탄생일 사이에 약 10년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사망할 당시 예수의 나이는 33세였거나 42, 43세였을 겁니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자 그동안 눌려있던 민중은 마침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시리아 총독 바루스(Varus)가 2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이끌고 민중소요를 진압하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헤로데가 통치하던 카이사리아에 임시로 임명된 총독 사비누스가 헤로데의 재산을 몰수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예루살렘 주민들이 저항하여 그를 헤로데 궁전에 감금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성전 일부가 불에 탔고 민중의 소요가 전국적으로 번졌습니다. 바루스 총독은 다시금 로마군단을 이끌고 와서 이 소요를 진압했습니다. 그는 갈릴래아의 반란군 지도자 유다와 그 세력을 초토화시켰고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민중을 분산시켰으며 무려 2,000여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형벌에 처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고 나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헤로데가 통치하던 영토를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하여 위임했습니다. 아르켈라오 헤로데는 유다·사마리아·이두매를, 안티파스 헤로데는 갈릴래아·베레아를, 필립 헤로데는 요르단 강 동편을 각각 맡게 되었습니다.

  서기 6년, 팔레스틴에서 다시금 민중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아르켈라오를 반대하는 유다의 귀족들은 로마에 사절단을 파송했습니다. 아르켈라오는 로마로 소환되었으며 결국 폐위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유다·사마리아·이두매를 황제 직속령인 ‘유다 총독관구’로 삼았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라는 칙령은 이러한 상황에서 납세의무자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호구조사에 강렬히 반발한 유다의 민중은 민족적 차원의 납세거부 운동을 감행합니다. 이때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곳이 바로 갈릴래아입니다. 갈릴리 지역 바리사이파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은 훗날 서기 66년에서 70년에 있었던 대 로마 무장 항쟁으로 이어집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다 제1차 항쟁(66-70)은 카이사리아에서 발생한 유다인과 이방인의 분쟁이 발단이었습니다.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며 항쟁을 진압하자 유다는 모든 특권을 잃었습니다. 사로잡힌 포로 2,500여명은 카이사리아에서 검투사 경기로 희생되었습니다.

  마태가 기록한 기원전 4년경이나 루가가 기록한 서기 6년경은 유다 민중의 저항이 민족적 차원으로 이루어진 때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기록된 마르크의 복음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이 선택한 두 가지 출생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메시야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메시야의 출생지가 베들레헴인 까닭은 그곳이 예언서에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곳이 다윗의 마을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이 기다려온 메시야란 다윗처럼 자기들을 해방시키고 독립시킬 강력한 임금이었습니다. 한편, 세 복음서의 저자들은 한 목소리로 메시야가 갈릴리 지방 나사렛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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