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곳, 그 사람들 - ②
나는 새처럼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떤 것을 할 수 없다고 억누르면 더 답답해하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러한 일탈의 재미와 소중함을 깨달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다니던 학교는 시골에 위치하여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고 높은 학구열을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자유는 부족했다. 허가증 없이 학교 정문을 나가는 것이 불가했고 교내에 매점이 없어 군것질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군것질보다 사실 내게 소중했던 것은 잠시 숨 돌리고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청소 담당구역이 같아 친해진 친구와 마음이 통했고 우리는 식당 뒤편에 산길이 작게 나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의 매일 그곳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갔고, 그렇게 약 10여분씩 친구와 수다를 떨고 뛰어다니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 친구와의 일탈 덕분에 답답했던 수험생활을 잘 버텨내고 원하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에서 가장 ‘자유’라는 말이 어울리는 도시였다. 스페인,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 유럽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도 북미 원주민, 노예로 끌려온 흑인 문화까지 어우러져 있는 다문화적 배경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든 음식 문화, 건축 양식, 각종 화랑과 라이브 뮤직을 보며 독창적인 예술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자유의 도시에서 우리의 미국인 투어 리더는 자유여행을 하기 전에 다소 무심한 미션을 주었다. ‘프렌치 쿼터’라고 불리는 구역의 관광지를 위주로 여행을 하라며 뉴올리언스 지도에 조그마한 사각형을 그어준 것이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구역 밖이 딱히 위험해서라는 등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 작은 사각형을 보며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가장 기분이 찝찝했던 것은, 여행 오기 전부터 찜해두고 가고 싶어 했던 국립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이 그 구역 밖에 있다는 것이었다. 고분고분 말을 들을 내가 아니었다.
일탈도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 우선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유명한 Café du Monde라는 카페에 들렀다. 프랑스 식민지를 겪었던 뉴올리언스는 그 음식 문화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눈꽃 같은 슈가파우더가 잔뜩 올라간 프랑스식 튀긴 도넛 베네와, 함께 곁들여 마시는 카페라테가 매우 유명했다.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는 대기줄이 굉장히 길다고 했지만 일찍 일어난 새였던 나는 여유롭게 착석할 수 있었다. 야외 테라스에 앉아 현지인 인양 자세를 편안히 잡고 아침식사를 했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 도넛과 우유맛이 느껴지는 달콤한 카페라테 덕분에 힘을 얻고 기분 좋게 뉴올리언스의 아침 항구를 걸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기념품과 셔츠 등을 판매하기 위해 상인들이 분주히 상점을 열고 있었다.
소화를 시킬 겸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다가 일탈을 시작할 열차역으로 향했다. 그곳은 야외로 트여있고 몇 개의 벤치가 놓여있는 소박한 장소였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처마 아래의 벤치에 앉아 나는 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옆 벤치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어르신 두 분이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얼떨결에 나도 대화에 끼게 되었고 소년 같은 그분들의 천진한 미소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 박물관은 뉴올리언스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야. 두 분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하고 쾌재를 불렀다.
전쟁박물관은 그동안 가봤던 박물관 중 단연 최고였다. 실제 2차 세계대전에서 쓰인 비행기와 전차가 있는 등 수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고, 전쟁의 흐름을 보여주는 구성이 알찬 데다 규모가 엄청났다. 특히 전쟁의 참상을 잘 보여주는 개개인의 실제 스토리와 편지들은 그 박물관이 철저한 계획과 수많은 검증을 바탕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4D영상관이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인 톰 행크스가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은 것이었다! 그가 이미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10부작의 전쟁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것을 알고 있었다. 드라마는 2차 대전 당시 활약한 연합군 대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고, 전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아는 드라마였다. 2년 전에는 ‘그레이하운드’라는 영화에서 연합군 구축함의 함장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 2차 대전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고 지식이 많을 것이 틀림없는 그가 무척 멋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야에라도 마음을 쏟고 있는 사람은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그 매력이 돋보일 수 있는 것 같다.
전쟁박물관은 이후에 기회가 된다면 역시 전쟁의 역사에 일가견이 있으신 아버지와 함께 다시 한번 찾아보고 싶은 장소였다. 역시 이번에도 일탈의 힘을 빌려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앞으로도 위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활 속 일탈을 때때로 할 예정이다. 후회를 할지언정 그런 일탈을 통해 얻는 달달한 결과들을 아직 포기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