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견디는 방법
겨우 기어올랐다. 가파른 경사가 아득해 내려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위만 보고 올랐다. 드디어 끝이 보였다. 겨우 손 하나 올릴 수 있는 귀퉁이를 잡고 마지막 힘을 다해 한 발을 올려놓았다.
오르기 전에는 몰랐다. 내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걸. 순간순간 눈앞이 흐려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 올라가기만 해봐라. 이놈의 사다리 걷어차 버리겠다'고 씩씩거리며 올라갔다. 입이 떡 벌어지는 경치도 감탄사 몇 번 연발하고, 목청껏 '야호'하고 소리 한번 지르고 나니 그만이었다. 한 바퀴를 휙 돌다 코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무언가를 보았다. 있는 힘껏 목을 젖혀 올려다보았다. 아득하다. 이곳은 정상이 아니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겨우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내려다보니 보잘것없는 높이다. 마음은 시속 백 킬로였지만, 실상은 걷는 것보다 못한 속도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나니까 이 정도는 올라왔지' 하고 생각하다가, 내려다보고서야 알았다. 말없이 서서 그 사다리를 잡아주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나를 잡아주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가, 작열하던 여름보다 더 뜨거운 그녀들을 만났다.
우연한 기회에, 계획에 없던 강좌를 듣게 되었다. 석 달 동안 매일 출석해야 하는 강도 높은 수업이었다. 한 달이 지날 무렵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대부분 경력 단절 여성, 이른바 '경단녀'였다. 사십 대 초중반의 나이에 육아로 인해 하던 일을 멈춘 상태들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으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현실의 벽 앞에 가로막혔다. 경력 단절은 마치 삶의 단절처럼 보였다. 자식을 키우는 보람이야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멈춰버린 자신을 참아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강의실 뒤에 앉아 그녀들을 봤다. 지독한 폭염에도 그녀들의 어깨가 오슬오슬 떨리는 듯 느껴졌다. 무엇이 그리 두려웠을까. 사방이 막힌 벽 안에 갇힌 듯한 그녀들을 위해 그 벽을 뛰어넘을 뭔가가 필요했다. 돕고 싶었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일을 함께해보면 어떨지 생각했다. 미래가 희뿌옇긴 하지만, 또렷해질 때까지 시간을 견디게 해줄 수 있는 건 사람밖에 없다. 저마다의 단절되었던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돕고 싶었다. 그녀들에게 필요한 건 9 to 6가 아니어도 되는, 하루 몇 시간이라도 집중할 수 있는 공간과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강좌는 끝났지만, 서로에 대한 아쉬움으로 만남을 이어가던 그녀들과 한 명씩 만났다.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배를 띄워보려 한다고 말했다. 보잘것없는 장소이지만, 나의 사무실 공간을 함께 공유하자고 했다. 그렇게 모여서 망망대해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힘껏 노를 저어보자고 했다. 비록 지금은 가까운 사람조차도 자신들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녀들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서로가 주고받는 에너지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웃을 수 있었다. 그 웃음이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겨우 오르고 있을 때, 추락의 공포로 아래를 내려다볼 엄두조차 못했을 때를 생각한다. 묵묵히 그 사다리를 잡아주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혼자서는 오르지 못했을 거란 것도 안다. 작게라도 그 역할을 돌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장정이 곧 시작된다. 험난한 여정이 될 거란 걸 알기에 모두가 떨리는 마음이지만, 더 이상 두려워하질 않길 간절히 소망한다.
"겁먹지 마, 내가 잡고 있을게. 혼자가 아니야."
내가 듣고 싶었던 말, 이제는 해주고 싶은 말이 되었다. 사다리를 잡아주는 일이 이렇게 설레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떨리는 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달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 손에 땀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