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당신이 보입니다
빨간 신호가 들어왔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마음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멈추라는 신호였다. 옆에 아무도 없었지만, 분명히 들렸다.
“지금, 멈춰야 해!”
전화벨이 울렸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다. 휴대전화 화면에 또렷이 '진상'이라고 저장된 번호가 앵앵거리며 울어댄다. 공사 현장은 절반쯤 진행된 상태였고, 난 연일 시달리고 있었다. 공사 시작할 때 아파트 관리소장은 나를 불러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이 라인에 아주 '독특한' 입주민이 살고 있다고. 직감했다. 순탄한 현장이 되지 못할 거란 걸 말이다.
그는 민원 왕이다. 관리실 직원 모두가 혀를 내두른다. 입주민이 언제부터 '갑'의 위치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독특한 사람이라면 이골이 날 만도 한데 매번 처음인 듯 아프다. 목소리만으로도 강도가 느껴진다. 그는 말 그대로 '핵 진상'이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전화를 받았다. 인사 따위는 없다. 거두절미하고 또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낸다.
"오늘 무슨 공사를 했길래 이런 냄새가 납니까?"
"별 작업은 없었습니다만, 어떤 냄새가 나는지요?"
"그야 난 모르죠. 뭔 냄새인지는 당신이 알아내야지."
입술을 깨물었다. 소리라도 질렀다가는 감당하기 힘든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현장은 2층이고 그 독특한 입주민은 24층 주민이다. 개코보다 더한 코를 가진 건지, 상상으로 냄새를 맡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누구도 넣지 않는 민원을 이렇게도 열심히 넣는 그가 궁금했다. 찾아가면, 있는지 없는지 문조차 열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전화로만 민원을 넣는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갱년기 증세도 있는 데다, 이런 전화를 받으니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심장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요란하게 번쩍거린다. 폭발이 가까워졌음을 예고했다.
다음날 엘리베이터의 24층 버튼을 눌렀다. 올라가는데 채 1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에 온갖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그와 마주친다. 뻣뻣해진 심장이 막말을 쏟아낸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흔들린다. 말보다 나의 분노에 놀라는 눈치다. 달아오른 감정이 상대의 눈을 태운다. 공기마저 정지된 듯한 침묵에 호흡마저 멈추는 듯하다.'
'땡' 하는 도착 음에 정신이 번쩍 든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손이 떨린다. '차라리, 제발 집에 없어라.'는 주문을 외우며 손을 뻗는데 문이 덜컥 열린다. 그도 당황한다. 감정의 교차로에 켜진, '우선멈춤'이라는 정지 신호. 충돌 직전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손에 들려있던 박카스 박스를 내려놓으며 공손히 손을 모았다. 눈꼬리를 내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본의 아니게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어제는 좀 주무셨나요? 냄새는 좀 어떤가요? 괜찮으시면 제가 들어가서 확인을 좀 해보고 조치를 해드려도 될까요?"
그가 눈을 내리깐다. 휙 돌아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 민원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진상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멈칫'에서 두려움의 그림자가 얼핏 느껴졌다.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외로운 사람, 말이 하고 싶은 사람, 하지만 들어 줄 귀는 없는 사람, 누군가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바로 그런 사람'일 거로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의 마음이 이렇게 다르다. 지난밤의 빨간 신호를 무시하고 마음을 주저앉히지 못한 채로, 돌진했더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멈칫'은 의심이나 단순한 우유부단함이 아니다. 때로 '이 선택이 나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마음의 신호 버튼을 누른 건 나 자신이었다. 무턱대고 들이받았던 젊은 시절의 내가, 이겨도 상처만 남는 싸움이 있다는 걸 가르쳐준 까닭이다.
마음의 빨간 신호가 켜졌다면 무시하지 말고, 우선은 멈추고 볼 일이다. 공사를 마무리하고 현장을 떠나며 '진상'이라고 저장된 번호의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제서야 마음 한편에 '그린 라이트'가 켜졌다. 이제 다시 출발해도 좋다고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