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쓴 시

글이 아니어도 돼

by 펜 끝

한껏 폼을 잡고 서 있다.

우물우물 뭔가 대단한 포문이라도 터트릴 듯 양 볼에 바람이 한가득 들어있다. 소 되새김질하듯 우물거릴 때 알아봤다. 그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건 멋진 건배사가 아니었다. 앞에 앉은 사람은 무슨 죄인가. 멋쩍은 웃음이 먼저 터지는 순간, 하얀 포말들이 앞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누가 보면 샴페인이라도 터트린 줄 알겠다.


민망함은 곧 서로의 웃음으로 덮였다. 다시 그의 입에 시선이 모인다. '제발'이란 말을 꿀꺽 삼켰다. 기대가 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번엔 자리가 자리인 만큼 뭔가 다를 거로 생각했다. 선언할 필요도 없는 '은퇴 선언'을 굳이 하겠다고 해서 모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간의 시간을 한 방에 정리하려고 하니 그게 어디 쉽겠는가. 건배사는 그래서 어렵다. 한 단어, 한 문장으로 내 삶을 정리하듯 외치고 잔을 높게 들어야 하는 일이다. 시시껄렁하게 정리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안다. 조마조마하다. 이건 뭐 서스펜스 영화 저리가라이다. 드디어 입술이 벌어졌다.

"먹고 죽자!"


아뿔싸, 높이 들었던 잔들이 낙엽 지듯 우수수 떨어졌다. 먹고 죽을 생각은 일도 없는 사람이 태반인데 이 눈치 없는 건배사가 웬 말인가 싶었다. 분위기 수습이 필요했다. 누군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옆구리가 버튼도 아닌데 벌떡 일어서는 나는 또 뭔가. 그와 나는 찌질했던 서로의 모습까지 다 알고 있는 사업 파트너이기도 했다. 뭔 말을 하고 싶었는지 그 맘을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다시 잔을 번쩍 들고 외쳤다.

"죽었다 치고! 두 번째 인생으로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합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를 응원했다.


들이키는 술잔의 절반은 음료이고, 그마저도 절반은 맹물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더 이상 술잔을 기울이지 못하는 이들이 늘었다. 술맛도 모르면서 마시던 사람, 덜컥 겁이 나서 끊은 사람, 마시면 계산부터 하는 사람, 걱정스러워할 만큼 얼굴이 홍시가 되어버리는 사람, 혈당 걱정에 술잔을 노려보는 사람. 이제는 모두 각자 알아서 마시기로 암묵적 합의를 한 지 꽤 되었다.


모이는 게 좋고, 얼굴을 보는 게 좋아서 만났으니, 술잔이 돌아가는 게 인지상정이나 이렇듯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 잔 속에 무엇이 담겨있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웃고 울고 걱정하고 위로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마시면 그만이다. 내 삶도 한 잔 따라주고, 네 삶도 한 잔 얻어 마시고, 술술 넘어가는 서로의 삶이 유독 달짝지근한 날이었다.


삶의 도수가 높은 모양이다. 다들 맹물을 마시고도 취한 얼굴들이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마지막 잔을 높이 들었다. 만회할 기회를 주자고 다시 멋진 건배사를 권했다. 그는 발그레하게 취기까지 올라와 있었다. 뭔가 불안불안했지만 다들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그의 입으로 다시 시선이 쏠린다. 또 뜸을 잔뜩 들이더니 내뱉었다.

"같이 죽자!"


술잔이 안 날아간 게 다행이었다. 참으로 구제 불능 건배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같이 죽고 싶을 만큼 소중한 사람들이란 표현을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걸 말이다. 찰떡같이 알아듣는 서로가 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다시는 건배사를 시키지 말자고 여기저기서 눈을 찡긋거린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로의 눈을 보며 뜨겁게 손을 흔들었다.


예이츠가 쓴 시 [Drinking song]에 이런 구절이 있다.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이렇게도 시를 쓰는구나. 글이 아니어도 되는구나.' 내일이면 생각나지 않을지 모를 취기 어린 생각이겠지만, 함께 시를 쓴 하루였다고 우기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이 아니면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오타투성이였지만 '넌 구제 불능이야. 구질구질하고, 제멋대로이지만, 불사조 같은, 능력이 있으니 잘 살 거야. 나도 곧 합류할게. 딱 기다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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