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짝의 쓸모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걸요

by 펜 끝

등을 보이지 말기를 바랐다. 그가 등을 돌리면, 할 수 있는 건 자리를 뜨거나 등짝을 한 대 갈기거나 그것도 아니면 숨죽이고 그 등짝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나도 모르게 개수를 세고 있다. 하나, 둘, 셋..., 흰 머리카락이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다. 슬며시 손가락 두 개를 오므리고 목표물을 향해 돌진하고픈 걸 참는다. 보풀이 일어난 티셔츠 위로 한 가닥의 검은 머리카락이 숨을 할딱이고 있다. 헐렁하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 왜 머릿밑은 횅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한숨 섞인 내 콧바람에 성긴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연애할 때는 서로가 등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떠나는 버스에 오르기까지 뒷걸음질 치며 손을 흔들었다. 차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뭐가 그리 애틋한지 손목이 떨어져 나가도록 흔들며 그렇게 서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의 우린 서로의 등을 볼 일이 없었다. 처음 만났던 순간만 빼고 말이다.

연애의 첫 시작을 나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했다. 늘 이렇게 말했었기 때문이다.

"나, 당신 등짝에 반했잖아. 기억나지? 뒤에서 불렀었잖아. '저기요'라고 말이야." 그 말에 별로 딴죽을 걸지 않더니, 이번엔 아니었다.

"아니거든. 뒤가 아니고 옆길에서 불렀거든. 이젠 그마저도 가물거리나 보네. 날짜는 기억해?"

대답하지 못했다. 진심으로 기억나지 않았다. 계절도, 날짜도, 입고 있던 옷도. 얼마 전까지는 대충이라도 기억이 났었던 거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깡그리 잊어버린 건지 둘러대기도 민망했다.

이제는 등이 말한다. 나 화났다고, 그러니 건들지 말라고 말한다. 말로 화를 내는 대신 잠시 눈을 질끈 감고 혼자 씩씩거리고 있다는 걸 안다. 저절로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림이 필요하다.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가. 딱 보니 알겠다. 본인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거다. 등 돌리고 지금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거다. 서로 기억을 제대로 못 하니 대충 조작이라고 해볼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라는 게 움찔거리는 귓불을 보면 알 수 있다.

뒷모습은 앞모습과 다른 말을 할 때가 있다. 앞에서 하는 말은 바로 귀로 들어오지만, 등이 하는 말은 가슴으로 들어온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줄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가닥가닥 하얗게 빛나는 세월은 함께 한 시간이다. 약간 굽은 듯 동그래진 어깨가 '나 힘들었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나둘 늘어난 잔주름은 내려놓고 살아야 했던 이루지 못한 소망들의 흔적인 양 안쓰럽다.

앙다문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등을 와락 껴안지 않고 살며시 나의 마음을 끼워 넣었다.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나도 그렇다고. 잊어버려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전달된 걸까. 날갯죽지가 꿈틀거리는 걸 보니 곧 마음을 펼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훨씬 더 자주 등을 돌렸던 것 같다. 그것도 아주 팩팩거리며 돌아누웠을 게 틀림없다. 그런 얄미운 등짝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갑자기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이다. 안 물어보련다. 모르는 게 약일 듯싶다.

그래도 양심이란 게 있으니, 말하지 않아도 들린다고 말해 줄 그에게 '미안해'라는 말 대신 등짝을 한번 슬쩍 내밀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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