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도 놀이가 필요해
초등학교 내내 '인형 놀이'에 빠져 살았다. 양손에 인형을 하나씩 들고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댔다. 대부분은 공주와 왕자였거나, 엄마와 아빠, 엄마와 아기였던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될 수 있었던 그 놀이가 좋았다.
"여보, 이제 오세요. 오늘도 돈 많이 벌어 오셨어요?"
들은 대로 말했던 것 같다. 인형 놀이에서는 엄마, 아빠는 사이가 좋았다. 싸우지도 않았다. 종이에 그리고, 색칠하고 오려서 입힌 드레스는 커튼을 하고도 남을 만한 폭이었고, 보석이란 보석은 다 달고 있었던 것 같다. 왕자님을 기다리며 늘 잠만 자고 있었던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만의 가상 세계는 이모가 사다 준 미제 비스킷 깡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춘기가 되면서 상상의 나래는 '어른이 된다면...'으로 바뀌었다. 어른이 되기만 하면, 원하는 만큼 돈을 벌고, 나만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고, 멋진 일을 하면서,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 다니는 상상을 했다. 정작 꿈꿀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행복조차도 추상적이기 그지없어서 변소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만큼이나 변덕이 심했다.
어른이 되어보니, 정확히 말해 나이 먹고, 몸이 다 큰 성인이 되어보니 공상과는 딴판이다. 나만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났지만, 때론 버겁다. 사랑의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각자 알아서 잘 놀았으면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돈은 벌었지만, 먹고사는 데 딱 필요한 만큼이었다. 내 돈 그릇은 사발도 아닌 종재기에 불과하다는 걸 안 이후로, 욕심은 접었다. 원하는 일도 수시로 바뀌어서 옆에 사람은 멀미가 나서 죽을 지경이라고 하소연한다. 나 역시 멀미가 난다. 다만 그 속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공상이 그런 시간을 견디게 해주었다.
노인 인구가 인구의 이십 퍼센트를 넘겼다고 호들갑이다. 죄다 부정적 여론이다. 오래 사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비율이 높아 보이는 것이지, 노인이 어디서 생겨나서 많아진 게 아니다. 그럴 땐 꼭 ‘어른’ 대신 ‘노인’이라고 부른다.” 노인의 존재를 '민폐'로 여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떨떠름하다. 왜 그런 건지 '어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인형 놀이를 하던 그때처럼 '어른 놀이'를 시작해 볼까 한다. 한 손에는 어물쩍 어른이 된 '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마냥 어른이 되고 싶었던 '나'를 들었다. 노인이 된 후를 상상하며 '어른 놀이'의 첫 대화를 시작했다.
"자식들에게 부담 안 주려고 열심히 살았다. 연금도 받을 테니, 내 걱정일랑은 말고."
"맨날 심심하다고 전화하시는 게 더 걱정인걸요. 혼자서도 재미나게 잘 지내시는 게 도와주시는 거예요."
"아무리 심심해도 너한테 놀아달라고 안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라."
아, 가상의 대화조차도 세 마디를 주고 받기가 어렵다. 상상력의 부재다. 소통은 물 건너갔다. 나이만 먹었지, 딱히 새겨들을만한 말도 해줄 게 없다. 나는 아직 어른이 못되었나 보다.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어른 놀이'에 좀 더 심취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