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에게 길을 묻다

어디에 흔적을 남길 것인가

by 펜끝

방문이 활짝 열려있다. 딸아이는 이틀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졸업 작품을 남겨놓고 학교에서 쪽잠을 자며 몰두하고 있다. 남편은 그런 딸이 안쓰러웠는지, 등산용 침낭을 사줬다고 했다. 그 속에서 누에고치처럼 웅크린 채 누워있는 사진을 보내왔다. 곧 나비가 되어 날아갈 듯 해맑게 웃고 있다.


방문 앞에서 하나의 풍경을 바라보듯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 막 두 다리가 빠져나간 듯, 바지가 허물인 양 또르르 말려 있다. 이불은 마치 딸아이가 누워있기라도 한 듯 잔뜩 바람을 안고 있다. 침대 한쪽 구석에는, 어릴 적부터 엄마의 사랑을 대신해 끌어안고 자던 도요새 인형이 빛바랜 미소를 짓고 있다. 데이트를 위해 화장을 하던 거울 밑에, 읽으라고 준 책 세 권이 받침대로 쓰이고 있다.


아이의 꿈은 내 것과 다르다. 다행이다. 성마른 부모 욕심에 누에의 배를 가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방문을 그대로 열어두었다. 흔적이 눈에 뜨이는 게 좋다. 언제가 떠날 아이지만, 그 어지러운 방 안의 풍경이, 그 흔적이 때론 위안이 된다.


손바닥만 한 테라스에서 남편이 뭔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뭐 해?"

갑작스러운 내 목소리에 놀라 철퍼덕 엉덩방아를 찧었다. 귀신을 본 것도 아니고 이렇게 놀랄 일인가 싶다.

"오늘도 그 녀석이 다녀갔어. 여기다 뭘 묻어두고 갔네. 한번 볼래?"


그 녀석은 우리 집을 세컨드 하우스쯤으로 생각하는 까마귀다. 새벽녘에 지붕을 걸어 다니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 발걸음이 조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 대담함에 오히려 집주인인 나를 머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들반들한 까만 부리로 흙을 헤집어 놓은 자리에, 윤기 나는 도토리 몇 알이 반쯤 파묻혀 있었다. 이게 다 뭐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남편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린 눈빛만으로 장난기가 발동했다. 손톱에 흙이 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살 녀석의 보물창고를 파냈다. 그리고 감쪽같이 흙을 덮어두었다.


밤에 불도 켜지 않고 창문 앞에서 녀석의 동태를 살폈다. 드디어 왔다. 익숙한 듯 담벼락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 화분으로 날아가 앉았다. 보인다. 당황하는 모습이. 그때 홱 하고 우리 쪽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에 간이 콩알만 해졌다. '너희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쳐다보는 게 아닌가. 온몸이 까만 데다가 눈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하다. 퍼드덕거리며 원망의 날갯짓을 해댔다. 골목 전봇대 위, 우리 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까아깍' 자꾸 듣다 보니 아이들이 '까까' 달라고 할 때의 소리처럼 들렸다.


어설픈 흔적 지우기는 실패했다. 다시 그 자리로 녀석의 '까까'를 가져다 놓았다. 우리 집이 만만하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했나 본데, 장난기 하나로 녀석의 삶의 흔적을 지우려 한 우리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 며칠 녀석이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다.


흔적은 결국, 마음에 남는 거다. 그새 정이 들었었는지, 녀석에 대한 그리움이 늦은 오후, 집안으로 길게 들어오는 햇살이 되어 흔적을 남긴다. 그렇다고 삐져서 안 오냐는 원망이, 남편이 허공에 대고 뿜어내는 담배 연기처럼 하얀 흔적을 남기며 사라진다. 그렇게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인 하루가 귤껍질 같은 노을이 되어 일렁인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떠올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 또한 흔적이지 않을까. 영원히 남을 흔적이 되기를 바라진 않는다.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리는 흔적이면 어떠한가. 매일 다른 모습으로 흔적을 남기는 삶, 종이 위에라도 흔적 남기기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떨어진 낙엽도 땅으로 스며들어 생명의 흔적을 남기듯, 첫사랑 같은 서툰 마음이 글이 되어 말을 건넨다.

"부끄러워 마세요. 흔적을 남겨줘서 고마운걸요. 그렇게 시작하는 하루가 힘이 되는걸요."


딸아이의 부재가 남긴 흔적이 새벽비가 되어 내린다. 어제의 네모났던 하루를 적시고, 발길을 재촉하듯 동그란 하루를 밀어 올린다.

'흔적'에게 길을 묻고,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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