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단칸방

외눈박이의 꿈

by 펜끝

이사를 했다. 잘 살 수 있을까?


바쁠 것 없이 망중한을 즐기며 누워 있는데 유독 반짝이는 뭔가가 눈앞에서 알짱거렸다. 제일 좋아하는 멸치였다. 웬 떡인가 싶어 덥석 물었다. 목구멍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온몸이 수직으로 상승하더니, 수면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게 뭐란 말인가? 같은 파랑인데 바다와는 전혀 다른 푸르름, 생전 처음으로 하늘이란 걸 봤다. 내 목구멍에 걸려 있는 가느다란 줄 끝에, 이가 다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기는 사람이 있다. 뱃머리에 '브런치호'라고 적힌 글자가 물비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낚였다.


출렁이는 차에 실렸다. 물속에서 멀미가 나기는 처음이다. 바깥세상이 훤히 내다보이는 통창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집에 입주했다. 명패가 붙어있다. '자연산 광어'가 내게 붙여진 이름이다. 다행히도 저 멀리 빨간 등대가 보이는 방파제 너머로 살던 바다가 보였다. 살던 곳과 물맛은 좀 달랐지만, 여럿이서 같이 살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낯을 가리는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한동안 납작하게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눈을 굴리며 이웃을 살폈다.


다음 날부터 '보여지는' 삶이 시작되었다. 좋든 싫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숨을 곳도 없고, 죽은 척하고 허연 배를 뒤집어 보일 수도 없다. 보이는 삶은 제각각이다. 낙지는 아까부터 유리에 들어붙어 내 시야를 가리고 있다. 저렇게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 봐야 탈출구는 막혀있지만, 다리가 있어 도망갈 궁리라도 할 수 있는 낙지가 부럽기도 하다. 돌돔은 존재감 발산하느라 여념이 없다. 잘난 척해 봐야, 먼저 접시 위에 올라 안주밖에 더 되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수족관 앞에서 매의 눈으로 우리를 유심히 보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날 가리킨다.

"이거 자연산 맞아?"

자존심이 상한다. 보면 모르냐고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이렇게 선명한 무늬를 갖고 우아하게 광을 뿜어내고 있는데 몰라보다니. 사람들 입맛에 맞춰 길러진 양식 광어와는 다르다고, 하나 있는 눈을 부릅떠봐야 소용이 없다.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오래 산 게 자랑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해 주고픈 이야기가 많다. 그 바닷속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밤이 되면 길고 미끈한 두 다리가 생겨 뭍으로 올라오는 상상을 하며 보낸 날들에 대해서 말이다. 물방울처럼 터져버릴 한낱 꿈에 불과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를 유심히 보던 그 사람에게 낙점되었다. 곧 상에 오를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물기 촉촉한 깻잎 위에 올려놓고 각자의 입맛에 맞는 장을 바르고 입안으로 쏙 집어넣어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어주는 상상을 한다. 이런 삶도 괜찮은 듯하다. 바닷속이든, 작은 수족관이든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닌가 보다. 어디서든 꿈꿀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플랑크톤이나 먹고 사는 순한 어종이 아니다. 보기보다 성질머리가 좀 사납고 게다가 육식성이다. 멸치 한 마리에 낚여버렸지만, 그 덕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지 않았는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삶이 때론 힘겨울 때도 있지만, 그 녀석을 만나는 것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 방어 철이다. 살집이 좋고 기름기가 쫘르르 흐르는 녀석은 나의 천적이다. 수족관이 좋은 점은 녀석과 한방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옆 수족관에 빤히 녀석이 보이긴 하지만, 무서워서 납작 엎드려있는 게 아니다. 언제나처럼,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좋다.


단칸방이면 어떠랴. 크기는 달라도 알고 보면, 하늘도, 바다도 단칸방이긴 매한가지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저 파란 하늘을 내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럭저럭 잘 살 수 있을 듯하다. 가끔은 바다를 그리워하겠지만, 걱정하지는 않는다. 외눈박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먹고 사느라 붙어버린 탓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세상만 보고 살았다.


삶이 다해, 내 몸이 하얗게 뒤집혀 떠오른다면, 그때는 온전해져 있을 나의 두 눈에 하늘을 가득 담고, 바다의 품으로 떠날 수 있으리란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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