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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담 Jan 30. 2019

이름이 뭐예요?

다 좋다가도, 다 별론가 싶다가도.

1. 우리 어머니가 내 동생을 임신했을 때, 친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셨다. 생전에 교회 목사님이셨던 할아버지는 좋은 한자와 여러 뜻을 더해 '성령님의 은혜'라는 뜻의 "성은"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셨다. 우리 부모님도 괜찮은 이름이라고 생각해 내 동생은 성은이가 됐다. 아니 될 뻔했다.


한창 한글 공부를 하고 종이에 낙서를 하며 놀던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아니 내가 내 동생 이름을 지어놨는데 왜 성은이냐, 라는 알 수 없는 생떼를 부리며 뒤집어진(?) 나를 달래기 위해 부모님은 꽤 애를 먹었다고. 문득 궁금해진 부모님은 나에게 물어보셨단다.


"동생 이름을 뭐라고 지었는데?"


겨우 진정된 나는 '내가, 내 동생 이름을 '하은'이라고 지어놨는데 왜 성은이라고 하냐'라며 재차 흥분해 부모님은 일단 알겠다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이름 얘기만 나올 때마다 방방 대며 '하은'을 외치는 5살 작명가 소년 때문에 부모님은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도, 할아버지도 참 황당했을 것 같다. 겨우 이름 지어놨더니 5살 꼬마의 반대에 부딪히다니..


동생 이름을 지었다는 게 기특하셨는지 할아버지는 '하은'이라는 이름을 놓고 분석하셨단다. 여자 아이의 이름으로 예쁜 이름이었고, 뜻도 좋은 한자가 많았다. 여기에 성령님 대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할아버지의 성경적 작명을 붙이기로 해 결국 내 의견은 존중받아 내 동생은 '하은'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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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3일 째, 붓기가 더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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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의 이름 에피소드만 이야기했다 하면 부모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신다. 그 어린 나이에 뭘 안다고 이름을 지었을까? 당연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없는 일이고 그때처럼 찰떡같은 이름을 짓는 능력은 더더군다나 없다.


도담이의 이름을 놓고도 많은 고민을 했다. 너무 남성적인 이름은 싫고 중성적인 느낌을 주려고 하면 오히려 여자 이름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주나 성명학에는 문외한이고 작명소에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쓸 이름이라면 부모님이 지어주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라는 의견에는 아내와 동의했다.


다양한 후보 중 처음 마음에 들었던 이름은 '시하'였다. 아내의 별명과 내 별명에 모두 '시'라는 글자가 들어가기도 했고, 중성적이면서도 세련된 느낌이었다. 사실 시하로 꽤 기울어지긴 했지만 여자 이름 같다는 반대 의견이 많아 새로운 후보를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막강한 후보는 '은찬'과 '예준'이었다. 두 이름 모두 도담이의 출생 날짜와 시간 등과 연결시켰을 때 성명학, 사주학 등에서 90점 이상을 상회하는 높은 점수를 받은 이름이었다. 나는 은찬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고 아내는 둘 다 예쁘다고 했다. 부모님께 '은찬이라는 이름으로 결정할까 고민 중이다'라고 말씀드렸을 정도로 마음에 들기도 했고 그밖에 다른 후보가 많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아내가 임신했을 때 만든 도담이 소식 SNS 채널의 이름을 '도담 일기'에서 '은찬 일기'로 변경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야근으로 인해 퇴근이 늦어 병원으로 못 가고 집으로 가서 아내와 떨어져 잔 다음 날 아침, 아내가 갑자기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진이라는 이름은 어때?"


갑자기?


공식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도담이는 은찬이가 된 것이 아닌가' 했던 나에게 아내는 '하진'이라는 이름을 내밀었다. 어떻게 나온 이름이냐고 묻자 아내는 밤에 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가 갑자기 하진이라는 이름이 생각났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가 생각난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거의 결정된 작명에 갑자기 불쑥 고개를 들이 민 새 이름, 거기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좋아서.


일단 좋은 한자가 있나 찾아볼게,라고 대답하고 이런저런 한자들을 조합해서 의뢰를 맡겼다. 요즘에는 인터넷이나 어플에도 무료 작명 기능이 많이 있어서 한자를 조합한 이름을 의뢰하면 대충의 사주와 운세 등을 고려해 점수를 매겨준다. 여기에 부족한 점이나 수정할 점이 있으면 피드백을 주기도 한다.


하, 진을 놓고 마음에 드는 한자를 찾아보다 '크게 열릴 하'와 '베풀 진'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진'이라는 글자는 '보배 진'을 많이 쓴다고 하는데 '베풀 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름을 풀어쓰면 '크게 잘 돼서 많이 베풀고 사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의미가 됐다. 하진이가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만큼 사람들에게 사랑을 줬으면 하는 아내와 내 바람이 잘 들어간 이름 같았다.


두 한자를 입력해서 무료 감정을 맡겼는데 세상에. 97점이 나왔다! 성명학적이나 평생에 걸친 사주,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이름이었다. 평생에 걸쳐 잘 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운명이라고 나오는데, 신뢰가 가서라기보다는 기분이 좋았다. 자기 아들 잘 된다는데 싫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점수가 다 잘 나오나 싶어서 여러 한자를 조합해봤으나 최하 30점부터 다양하게 점수가 나오는 걸로 봐서 그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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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찬'이라는 이름과 '하진'이라는 이름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아내는 둘 다 좋다고 했지만 하진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눈치였고 나는 둘 다 상관없었다. 주변 지인들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신기하게 항상 50대 50으로 갈렸다. 은찬이가 좋다는 사람들과 하진이가 낫다는 사람들이 나름의 논리와 의견이 팽팽해 결국 결정은 우리 몫으로 되돌아왔다.


아내는, 은찬이라는 이름이 어른이 됐을 때 조금 별로일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내가 나섰다.


"하진이로 하자, 좋은 이름도 좋지만 네가 짓고 내가 뜻을 붙인 우리 이름이잖아."


이름을 바꿀 수도 있고, 별명이 생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가 붙인 이름은 '하진'이가 됐다.

정말 '건강하게만 잘 자라 다오'라고 붙인 태명 도담이,

세상 빛을 보러 나와 우리를 만났고 이제는 하진이가 되어 우리와 울고 웃으며 평생을 함께 살아갈 아이.


크게 잘 되어 많이 베풀고 사는 건강한 어른이 되었으면 한다.

잘 부탁해 하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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