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고 남에게 악을 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교묘한 이치가 옛날부터 존재해 왔고, 또 당연한 관습으로 굳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1권 p.328
[부활], 톨스토이, 민음사, 2005
책을 읽을 때 제게 기준이 되는 저만의 리스트가 있는데요,
꼭 읽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잘 손이 가질 않고 엄두가 안 나서 읽지 못하고 있는 작가들의 리스트입니다.
그리고 그 리스트에 가장 상위에 있는 작가들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 찰스 디킨스 그리고 톨스토이입니다.
이분들을 순서대로 제 마음대로 정의하자면.. 어려움, 낯 섬, 부담스러움?입니다. 저에게는 말이죠 :)
이분들의 여러 작품을 두고 우리는 ‘고전’이라고 일컫습니다. 고전의 사전적인 정의를 찾아보면 ‘예전에 쓰인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정의가 저에게는 처음엔 그렇게까진 와 닿진 않았습니다. 흠..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란 것이.. 조금은 추상적인 말 같았거든요. 그런데 처음으로 이 정의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톨스토이의 [부활]입니다. 시대를 넘어 변함없이라는 부분을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오랜 시간 고민해온 문제를 일컫는 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톨스토이의 삶의 정의에 대한 완성본
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여러 메시지를 담고 있고, 여러 방면으로 가치가 높은 책인데요. 저는 이 책의 여러 메시지 중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함께 고민해보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중심으로 책 소개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부활은 처음에는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본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인간의 내면뿐만 아니라 인간 외적인 사회 문제까지 건드린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부 시절 '문제적 작가'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는데,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부분을 배웠었더라면 수업을 좀 더 흥미롭게 들었을 텐데, 조금 더 빨리 읽었다면 좋았을걸... 많이 아쉽네요. (하지만 책 속 등장한 사회 문제는 제가 이번에 소개해드릴 주제는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읽은 책 중 어떤 것은 하나도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을 적어 놓는 습관이 생겼는데요, 이 책은 한번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는 부분을 보고 적기 시작하면 어느새 여러 쪽을 적고 있게 될 정도로 정말 놓칠 부분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잘 쓴 작품이라 계속 감탄하면서 필사했습니다.
신기하게도 톨스토이가 이 작품을 쓴 19세기-20세기를 넘어가는 시기가 훨씬 지났음에도 현대에도 이 책의 많은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권력 구조 들이 여전히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세기를 뛰어넘은 작가의 질문을 보면서 아.. 이래서 톨스토이를 대문호라는 칭하는구나를 깊게 공감했습니다. 아마 이 책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힐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여러 주제를 담고 있고, 여러 감동을 주는 책입니다.
우리 사이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의 하나는 인간은 각기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선인이라든가 악인, 현인, 어리석은 사람, 근면한 사람, 게으른 사람 등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구분해 단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저 사람은 악인일 때 보다 선인일 때가 더 많다든가, 게으를 때보다 부지런할 때가 더 많다든가, 어리석을 때보다 똑똑할 때가 더 많다든가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인간을 두고서 당신은 성인이라든가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선 당신은 악인이라든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인간을 그런 식으로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이다.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물은 어느 강에서든 흐른다는 데는 변함이 없으나 강 하나만 생각해 보더라도 어느 지점은 좁고 물살이 빠른 반면, 넓고 물살이 느린 곳도 있다. 또 여기서는 맑기도 저기서는 탁하기도 하고, 차기도 따스하기도 하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누구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격의 온갖 요소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어 어느 경우 그중의 하나가 돌출하면 똑같은 한 사람이라고 해도 평소의 그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사람에 따라 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네흘류도프는 이런 유형의 인간에 속했다. 그에게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인체와 정신 모두에 있었다. 지금도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1권 pp.341 -342
제가 이 부분을 좀 더 빨리 읽었더라면... 제 삶에 제가 범한 오류들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인간을 단정적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 꼬집어 주었습니다. 이 부분에 제가 이렇게까지 공감을 하는 것은 제 스스로에게 느꼈던 생각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한 부분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그에 맞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타인에게도 저런 잣대를 적용하고 어떤 사람이다라고 판별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의 차이가 중요한 것은 이분법적인 잣대가 타인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어떻게 행동해도 된다는 권한을 부여하게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인을 변화시켜야 한다' 또는 '변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게도 합니다.
부활을 읽으면서 저는 톨스토이가 등장인물을 정말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등장인물이 이 책 속에 등장하는데요, 재판을 수행한 검사에서부터 정치범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고 그에 따른 이유 역시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선택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보일 순 있지만 그것을 그의 악함으로만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양한 인물들은 우리의 동료, 친구, 가족과 비슷한 존재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한 여성의 인생을 어그러뜨려 놓았습니다. 그러다 몇 년 만에 우연한 곳에서 그녀를 마주치면서부터 그때부터 자신의 죄를 인식합니다. 물론 그는 그녀의 삶이 그로 인해 어떻게 까지 흐를 수 있을지 알지 못했었지만 그가 그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해서 상황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그의 계속된 고민과 책임 의식이 가식적이고 형식적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란 속성에서 인간은 그것을 돌려놓는 기적을 행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부활은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부활이 아닌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부활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과오를 인지하고 인정했을 때부터 그의 삶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배를 타다 어떤 노인을 만나는 부분이 있는데요, 저는 이 부분이 이 작품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노인의 말처럼 이전의 네흘류도프의 삶은 타인을 믿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쉬운 방식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더욱더 이 대목이 책의 앞부분에 잠깐 등장했던 네흘류도프의 과거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변화는 그가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남을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믿지 않고 남을 신뢰하게 된 것은 자기를 믿고 삶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었다. 우선 자기를 믿는다면, 모든 문제는 언제나 안이한 쾌락만을 찾는 동물적인 자아가 아닌, 이와는 반대의 측면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타인을 믿는다면 그가 해결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을 믿으면 항상 사람들의 비난이 따랐으나 일단 남을 믿자 주위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를테면 네흘류도프가 신이라든가 진리, 부, 가난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읽거나 말하면 주위 사람들은 이를 당찮게, 사리에 맞지 않은 웃음거리로 여겼다. 심지어 어머니와 고모들까지도 이를 점잖게 놀리며 그를 우리 철학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소설을 읽거나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하거나 프랑스 극장의 우스꽝스러운 희극을 보고 그 얘기를 재미나게 들려주면 모두들 그를 칭찬하고 추켜주는 것이었다. - 1권 p.86
그를 둘러싼 상황은 그가 올바르게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실, 억지로 막은 것은 아니고 그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딱히 없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나중엔 고모들한테까지 받은 토지는 그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문제적으로 볼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보다 쉬운 남을 믿는 삶을 살기 시작했고, 자신을 믿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남을 믿는 삶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아무것도 믿지 않소. 단지 나만을 믿을 뿐이오.” 노인은 분명한 말투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자신만을 믿을 수 있지요?” 네흘류도프도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물었다.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아니, 결코 안 그래요.”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로 답했다. “ 그렇다면 여러 가지 종교가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노인의 말에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아니, 결코 안 그래요.”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로 답했다. - 2권 p.334
“어쨌든 인간은 자기 의무만 행하면 돼. 남의 일에 간섭할 건 없어. 어디까지나 나는 나고 너는 너야. 누구를 벌주고 누구를 용서한다는 건 하느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은 아니야.” 노인이 말했다. “자기가 스스로의 상관이 된다면 상관 따위는 따로 필요 없지. 자, 어서 나가게. 가버리게!” - 2권 p.368
마지막 장에 다다를수록 이 책에서는 놓칠 부분이 없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마지막 부분을 통째로 옮겨다 놓고 싶지만, 그건 이 책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남겨 놓겠습니다. 저는 마지막 부분을 2번 정도 읽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타인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 스스로를 믿고 자신의 규율을 정하여 자신이 어떤 삶의 형태로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갈 수는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네흘류도프란 인물의 삶에 대한 부활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원래는 '위대한 개츠비'를 오랜만에 다시 읽고 쓰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고.. 한동안 책을 읽기만 하고 올리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보게 되어 읽으면서 꼭 올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소개한 방향보다 이 책은 더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책입니다. 사실 글을 적으면서도 '자신의 대한 믿음' 키워드 말고도 다른 키워드를 주제로도 적고 싶었지만, 글이 정신없을까 봐 다 적진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