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씨 Sep 21. 2019

그래, 그랬지. 처음엔 다 설렜지.

#2: 모든 시작엔 떨림이 있었다



처음의 떨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모든 시작엔 떨림이 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하루를 가만히 돌이켜보면, 우리는 학교-집, 일터-집 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왜 내 하루는 더 생동적이지 못하나, 왜 내 일상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나. 그래서 왜 내 인생은 조금 시시한가. 그러나 되감기 버튼을 꾹 눌러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지루한 일상에도 늘 '처음'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처음엔 '설렘'이 있었다.


처음 등교하던 날,

처음 맞이한 여름방학,

처음 떠난 MT,

처음 먹어본 스테이크,

처음 이사하던 날,

처음 입사한 회사,

처음 갖게 된 차,

처음 받아 든 월급통장.


늦잠과 지각에 묻혀 생각도 안 나는 첫 등교와 첫 출근. 새 공책과 새 가방을 챙기던 설렘은 아무렇게나 던져둔 옷처럼 구석에 처박혀있고, 처음 이사하던 날의 두근거림은 손 때 묻은 벽지에 가려졌다. 출근 시간 붐비는 사람 속에 내가 있단 사실만으로 벅찼던 나날은 알람과 야근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까맣게 잊어버렸다. 공들여 정리했던 필기노트와 몇 번이고 확인했던 월급통장은 어디 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일상을 멈추고 싶어서 7일을 주기로 돌아오는 숱한 주말을 기다린다. 새로움을 찾아 연휴에 환호하고 월차와 연차를 끌어모은 휴가에서 사는 이유를 찾는다.

동시에 우리는 지루하다 하면서도 '그 일상'을 살아내며 새로운 맛집을 찾고, 첫 출시된 기기를 산다. 그러는 동안 곧 잘 웃고 즐거워하면서.


핸드폰에는 먹어볼 것과 가볼 곳을 잔뜩 캡처해두고 컴퓨터 안에는 먹은 것과 가본 곳이 두서없이 담겨있다. 여지없이 오늘도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위시리스트와 장바구니를 채운다. 우리의 일상은 볕 좋은 오후, 런던의 노천카페가 아니라 급하게 테이크 아웃한 커피에 있으며 보기만 해도 설레는 여행책자가 아니라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서류더미에 가깝고, 깔끔하게 정리된 5성급 호텔 대신 개어야 할 빨래 더미가 보이는 익숙한 거실에 있다. 에어컨 없이도 마냥 좋았던 홍콩의 2층 트램 대신 아침 일찍 공들인 드라이가 뭉개지는 만원 버스에 오르고, 낯선 땅에서 이름 모를이와 나눈 담소 대신 매일 보는 사람들과 매일 같이 날씨 얘기를 하는 것이 일상의 풍경이다.


어쩌면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나와 이곳에 사는 너도 이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설사 다른 일상을 꿈꾸더라도 어쨌거나 일단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다.


일상이라 부르는 하루하루에도 예외 없이 특별한 처음이 있었다.
처음이 머물다 간 자리, 이것이 일상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매거진: 처음이라는 행성


매거진의 이전글 처음은 늘 그렇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