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 속 빌런을 몰아내는 법

by 펜피디

너 이름이 뭐니. 아마 2018년이었을 거다. 내 재산 맡길 수 있냐며 퉁명스럽게 내뱉는 양희은의 저 물음은 광고 카피로 대박을 터트렸다. 그 광고가 제작된 지 5년이나 지난 지금, 새삼 저 이름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발단은 친구에게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였다.


왕꼰대. 아버지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난 누가 전화 왔는 지도 몰랐을 터였다. 내 친구는 핸드폰을 보더니 자신이 저장해 둔 아버지의 이름(왕꼰대)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아버지를 왕꼰대라 저장해 둔 친구를 보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 물었다.


"넌 나이가 몇 개인데 아빠를 왕꼰대라 해놨냐." 내 물음에 친구는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다 이유가 있어." 아빠를 유치 찬란하게 왕꼰대라 저장해 둔 데에 뭐 대단한 이유가 있다고, 난 궁금하지 않았다만, 친구는 구구절절자신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논리 정연하게.


"이름이 중요한 거 알지. 딱 저장해 둔 이름을 보는 순간 내 무의식은 바로 생각하는 거야. 아, 왕꼰대한테 전화 왔다. 그리고 난 바로 생각하겠지. 또 어떤 잔소리를 할까, 또 어떤 거를 시킬까.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전화 와서 나한테 그래. '딸아 저녁 먹었니? 그 순간, 난 감동의 쓰나미인 거야.

그래서, 왕꼰대라는 단어를 본 본 순간부터는 아빠가 뭔 말을 하든 웬만하면 다 오케이야. 싫은 소리 하면 그냥 왕꼰대니까 그러려니 넘기고. 좋은 소리 하면 왕꼰대가 웬일이야 싶은 거고.


웬걸. 내 친구가 처음으로 똑똑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타인이 내뱉는 말은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온전히 나의 영역이니까. 이름은 그런 나의 기대치를 낮추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날부터 난 친구의 말을 새겨듣고, 내 인생의 빌런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시작했다.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는 카카오택시기사는 '천만리, 깐깐한 직장상사는 '왕깐깐징어, 기상예보에 속아 따뜻하다고 착각한 오늘의 추위는 12월 한파: 이름을 부르자 그들에게 난 너그러워졌다. 택시기사가 좀 늦으면 어떠리, 그는 천만리를 건너서 나에게 오고 있는데. 상사가 말도 안 되는 거로 딴죽을 걸면 어떠리, 이 정도면 양반이지 그는 왕깐깐징어인데. 12월 한파에 이 정도 추위면 감지덕지다.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자 그들의 행동은 더 이상 악해 보이지 않았다. 이름보다 순한 그들의 행보에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어쩌면 내 인생의 빌런은 내 손으로 직접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난 앞으로도 이 이름 짓기를 계속해나갈 생각이다. 다만, 더 이상 쌓이면 내가 정해준 빌런들 이름이 헷갈릴까 그게 걱정이다.

명부라도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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