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안드로 에를리치 : 바티망
11월 첫째 주에 <바티망>이라는 전시회에 초대를 받아 방문했다. 노들섬의 노들서가에서 진행중인 전시 <바티망>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이라고 불리우는 '레안드로 애를리치'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레안드로 애를리치는 시각적 효과를 주는 장치를 활용하여 익숙함에 속아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착시효과를 자신의 수많은 작품 속에 담아낸다. 대표적으로 전시 <바티망>에서는 프랑스어로 '건물'을 의미하는 설치 예술 작품인 '바티망'을 선보이고 있다. 해당 작품은 사람들이 유럽풍의 건물 벽에 매달리거나 서있거나 하는 등의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벽면의 모습을 한 설치 작품을 바닥에 눕혀놓고, 바닥에서 45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세워진 거울에 비친 벽면의 모습을 활용한 착시 효과이다. 전시 <바티망>은 레안드로 애를리치의 재치와 감각이 넘치는 다양한 작품을 직접 체험하고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 굉장히 사랑받고 있다. 한동안 각종 커뮤니키와 SNS에 바티망 전시 인증샷이 피드에 파도타기를 하는 듯 했던 이유도 이러한 컨셉의 내용 덕분이지 않았나 싶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전시장에서는 예술작품을 정말 가깝게 경험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입고 있던 옷으로 바닥 청소를 하고 다닐 정도로 수많은 인증샷을 남기고 왔다. 물론, 전시장을 나올 때는 약간의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말이다.
다만, 전시장의 즐길거리에 속아 레안드로 애를리치가 자신의 설치 예술 작품을 통해 의미심장한 메세지도 전한다는 사실을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 전시장에 아주 많은 작품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도 1가지의 작품이 가장 인상깊게 남았다. 바로, 설치작품 'The Democracy ofthe Symbol, 2015'이다. 아쉽게도 해당 설치 작품은 한국에서 직접 볼 수 없기에 노들섬의 노들서가 전시장에는 해당 설치작품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왜냐하면 'The Democracy ofthe Symbol'은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인 오벨리스크 첨탑이 있다. 첨탑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시설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레안드로 애를리치는 과연 어떤 비틀어짐을 통해 세상을 바로 보려고 했던 것일까? 해당 작품이 탄생하던 시점의 아르헨티나를 살펴보면 얼마나 훌륭한 작가의 표현력이 담긴 작품인지 알 수 있다.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꿈꾸는 국민들과는 달리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3선을 위해 개헌을 하려고 했다. 이에 많은 국민들이 강력한 시위를 통해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아르헨티나'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레안드로 애를리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세지를 전했다. 앞서 말했듯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벨리스크 첨탑은 공공시설물이다. 하지만 누구나 이용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공공시설물임에도 불구하고 파워 엘리트와 같은 특권층에게만 개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민주주의'를 꿈꾸는 나라에서 이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레안드로 애를리치는 한밤중에 아르헨티나 수도 한복판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첨탑의 뾰족한 꼭대기 부분을 다른 조형물로 덮어서 마치 그 끝을 제거한 듯한 착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틴아메리카 미술관(MALBA) 산책로에는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오벨리스크 첨탑의 뾰족한 부위와 똑같이 생긴 설치 작품이 놓여졌다. 그리고 해당 설치 작품 내부에는 실제 오벨리스크 첨탑 꼭대기에서 볼 수 있는 전망이 비디오로 틀어지고 있었다. 이로써 레안드로 애를리치는 황당하고 기발한 설치 작품을 통해 세상에 "첨탑 꼭대기에서 보는 전망은 누구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전시를 모두 보고 난 뒤에는 열심히 작가의 장난기에 맞장구 치느라 살짝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했지만 심적으로는 최근에 본 전시 중에 가장 능동적인 메세지를 많이 떠올려 보았다는 괜한 뿌듯함이 들었다. 작품을 하나씩 감상하는 동안에 레안드로 애를리치의 천재적이고 평범함을 거스르는 다양한 표현을 마주했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그가 전하고 싶었던 의미가 무엇일지 계속해서 궁금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작품의 의미를 떠올려 보았고, 다음에는 작가가 전하려 했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때마다 그의 재치에 전율이 흘렀다. 평범한 소재인데 그 의미와 표현은 우아했다. 레안드로 애를리치는 스스로 '현실과 인식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개념미술가'라고 소개한다. 개념있다는 표현에 무척 동의한다. 혹시라도 수많은 이들의 인증샷에 의해 그저 재미로만 <바티망> 전시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개념미술가라고 당당히 표현하는 작가의 개념이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보는 시간을 꼭 가져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