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은채 Dec 04. 2023

도 를아십니까?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1년에 1번은 방학을 이용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비행기 티켓이 저렴한 월요일 귀국 후 목요일 일본으로 들어가면 반값으로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1년 만에 들어오는 한국에서의 4일은 짧았지만 일본에서의 아르바이트 공백을 길게 둘 수 없는 가난한 유학생이었기에 늘 촉박한일정으로 한국에 머물렀다가 돌아갔었다. 당시 대학교4학년이었고 27살이었다.


고등학생 때 유아교육과를 지원해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동생이 둘이고 아빠는 15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사무실을 막 개업했을 때라  대학등록금에 대한 부담을 줄 수가 없었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종합병원 소아과에서 3년간 근무했다. 일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자발적으로  병원에 갇혀 지냈다. 당직을 마다하지 않았던 덕분에 간호사선생님들에게 이쁨을 받고 아가들을 좋아해 보호자들과도 곧잘 지내며 통장에는 돈이 차곡차곡 모이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3년이 지나고 보니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미래에 대한 환상도 기대도 없는 23살의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우물 안 개구리   살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고등학교 때 영어보다는 일본어성적이 좋았기에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개구리는 일본으로 떠났다. 외국어학교 1년 연수과정으로만 신청을 하고 떠난 유학생활이었지만 배움의 미련이 남아 심리학과가 있는 근처대학이 목표가 되었다. 대학입학준비를 위해 외국어학교 6개월을 연장하고 외국인 특별전형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4년간 외국인이라는 핸디캡을 이겨내기 위해 모든 강의를 녹음 후 이해될 때까지 3번이고 4번이고 들었다. 학비를 벌어야 했기에 새벽 6시부터 도시락집으로 아르바이트를 4시간 한 후에 11시부터 4시까지 강의를 들었다. 다시 5시부터 10시까지. 5시간 도시락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말에는 한국어 과외를 했고 방학중에는 샐러드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기에 학비와 생활비가 충분히 충당되었다. 3학년때부터는 매달 100만 원이라는 장학금을 2년이나 받게 되어 오히려 돈을 모으는 외국인유학생이었다. 치열하리만큼 열심히 달렸고 뿌듯한 시간들이었지만 졸업이 다가오면서 현실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나를 지탱하는 시간으로 4학년을 2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지도교수님께서 본인이 계신 대학원과정까지 제안을 해주셨기에 결정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한국에서의 부모님 생각은 달랐다. 이제 그만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와 취직을 해야 할 나이라고 생각하실만한 나이가 되었으니 그러실 만도 했다. 나만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가족들 상황도 좋지 않은 일들이 겹쳐있던 시기였다.


한국으로 돌아가 취직을 할지. 대학원을 들어가 공부를 할지. 대학원을 간다면 졸업 후 내가 과연 일본에서 심리상담가로 활동을 할 수는 있을지. 걱정은 스트레스가 되어 천방지축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잃어가고 시간의 흐름에 그저 순응하고 있을 즈음이다. 2011.3.11 일본대지진이 일어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한국뉴스에서 쓰나미영상을 보여주며 일본방사능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고 여진피해와 잇단지진으로 일본이 당장 바닷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은 공포를 주던 날들. 일본뉴스에서는 안심을 목적으로 대처상항에 초점을 맞췄다. 한국에서는 오랜만에 시청률을 높이기 좋은 뉴스속보에 신나서 자극적인 영상들을 편집해 내보내는 공중파뉴스에 섭섭함마저 들었다. 당시 한국대사관에서도 한국인들에게 한국으로 대피하기를 권고하는 문자가 날마다 왔다. 유학생이 108명이었던 우리 학교에서 나와 스리랑카인 유학생을 제외하고는 본국으로 돌아간 상황이었으니 당시 일본에서의 유학생들의 공포감 또한 대단했다.


일본어학교를 다니던 여동생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어 한국으로 보냈고 나 혼자만 태연하다는 듯 여느 때처럼 도시락집에서 카라아게를 튀겼다. 이대로 한국으로 가면 지금까지의 일본에서 노력했던 시간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아 지진보다 쓰나미보다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 알 수 없는 그것에게 지기 싫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지는 것만 같았다. 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을 버텼다. 그리고 방학이 되어 한국으로 4일간의 외출을 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말로는 그 상황을 정의하기 부족하다. 머릿속의 회로가 멈췄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여기 서점이 어디예요?"

"아? 깜짝이야.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어머 죄송해요  놀라셨죠? 제가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서점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머? 근데 눈이 왜 그렇게 슬퍼 보이세요?

"네?"

"눈물 엄청 많으시죠? 겉으로 센척하시지만 마음도 많이 여리시고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단발머리에 깔끔한 외모. 나보다 두세 살 많아 보이는 언니는 눈빛으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길거리에서 서점을 물어본 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제 무슨 꿈꾸지 않았어요?"

"아니요. 꿈 안 꿨는데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대답을 했다.

"동생 있죠?"

"네"

"혹시 태어나지 못한 동생도 있지 않아요?"

"아. 네에. 저희가 딸 둘에 아들하나인데 남동생 태어나기 전에 또 딸을 임신해서 할아버지반대로 세상에 못 나온 동생이 있다는 걸로 기억해요.

"지금 아가씨 어깨 위에 그 동생이 있어요. 그 동생이 태어나지 못한 한이 있어서  아가씨를 괴롭혀요. 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앞으로 아가씨 동생들을 괴롭힐 거예요"


참하게 생긴 단발머리언니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계속 늘어댔다. 들을 가치도 없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나의 반응은 더 기가 막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제 동생들을 괴롭히면 안 되는데"

나는 당시 교회에서 4년 동안 동시통역을 하고 있었으며 믿음이 좋았고 종교가 없더라도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인간이다. 이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속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허술한 보이스피싱에 속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경청을 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그저 웃음이 나온다.


"기도를 해줘야 해요. 바로 옆에 기도원이 있어요. 지금 일단 마트부터 가요 "

"아. 제가 아빠가 30분 후에 데릴러올거라서 시간이 많지 않은데 가능한가요?"

"아 그럼 아가씨~마트는 가지 말고 간소하게 해야겠네요. 일단 기도원으로 가면서 이야기해요."

"네에. 기도는 어떤 기도를 하는 건가요?"

"태어나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잘 지내라는 뜻이에요"


기도원이라며 도착한 곳은 피아노학원의 간판이 붙어있었고 현관에는 이미 10켤레쯤은 돼 보이는 신발이 있었다. 작은방이 양쪽에 3개씩 6개 있는 걸로 보아 피아노학원을 하던 곳을 그래도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이 열려있는 방으로 단발머리언니는 나를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가니 덩그러니 좌식으로 된 상 하나다 놓여있었고 그 위에 하얀 종이와 붓이 있었다. 그 언니는 하얀 종이에 가족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모두 적으라고 했다. 아빠엄마 나와 두 동생의 생년월일을 적었다. 그렇다. 나는 제대로 미친것이다. 다행히 주민등록번호 뒷번호와 핸드폰번호를 적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언니는 묻는다. 지갑에 얼마가 있느냐고. 금액은 상관이 없다며. 예를 다하는 마음으로 전액을 기도금액으로 내면 된다며 돈을 넣는 함을 내 앞에 놓아주었다. 재수가 더럽게도 없는 날인 것이 명확한 것이 내 지갑에는 일본돈 10만 엔이 있었다. 한국돈 100만 원이다. 한국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서 일본으로 들어가야 했고 엄마아빠선물도 사드리려고 넉넉히 갖고 나온 돈이었지만 은행에서 아직 환전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본 엔화로도 되나요?"

"상관없어요. 예를 다하는 것이 중요해요"

만 엔짜리 열 장을 한 장 한 장 하얀 함 속에 넣었다. 매일 캄캄한 새벽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루도 쉬지 않고 하며 번돈. 외국인이 할 수 있는 있는 최대시간을 꽉꽉 채우고도 모질라 한국어 과외. 샐러드공장일을 하며 번 피 같은 돈. 그 흔한 자판기음료도 사 먹지 않고 물도 싸갖고 다니던 짠순이 유학생의 돈은 흐려진 판단력으로 인해 그렇게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 가족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쓴 종이를  상 위에 펼쳐놓고 그 언니는 주문을 외우는 듯 보였고 나에게 기도를 하라고 한다. 우리 가족을 괴롭히지 말라는 기도를 하면 된다고 진심으로 하라고 한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태어나지 못한 동생에게 지금 나의 동생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태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설움이 있구나. 다음생에서는 만나자. 그곳에서 잘 지내. 우리가 여기에서 너의 몫까지 열심히 잘살게. 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기도가 끝나고 이제는 아빠가 데리러 올시간이 다된 것 같아 서둘러 기도원을 나왔다. 나오기 전 단발머리언니는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늘의 일은 100일 동안 아무에게도 발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발설하는 순간 기도의 효염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기도원을 나와 가장 먼저 휴대폰에 100일 후를 체크해 두었다. 그리고는 아빠를 만나 방금 전의 일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일본에서 돈을 안 갖고 와서 돈이 없다며 4일 동안 쓸 경비를 부탁했을 뿐이다.

100일 후 나는 일본에 있었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은 서점이 어디인지 물었던 단발머리언니가 서있던 커피숍의 위치까지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알고 보니 그 커피숍 앞에 하루종일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서점이 어디인지 묻는단다. 그 바로 앞에는 큰 은행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 나무밑에는 험상굳은 남자도 한 명같이 있단다. 아마도 기도원을 갈 때 뒤에 같이 따라왔을 거라고. 단발머리언니에게 해코지하는 일이 있을 경우 보호하기 위한 그들만의 장치 같은 것인가 보다.

친구에게 "나그럼 100일 동안 속은 거야? 미치겠네. 아후 열받아. 나 미쳤나 봐"

"응. 너 미쳤어. 그거 도를 믿습니까 애들이야. 네가 일본으로 가야 하는 유학생이었으니 그나마 그 정도지. 안 그랬음 너도 그 소굴로 잡혀 들어갔을 수도 있어. 이 멍청아"

반박불가한 상황이다. 멍청이도 맞고 바보도 맞다. 어릴 적 친구들은 천방지축에 실실 웃고 다니는 나를 걱정하는데 그 사건 이후로 걱정의 수위만 높아졌다.

다시 생각해도 그날 나의 어리석음이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 만일 인신매매집단이었으면 어쩔뻔했는지 아찔한 기억이다. 인간은 나약해져 있을 때는 귀가 얇아지는 것이 분명하다. 얇은 정도가 아니라 거쳐야 하는 그 어떤 단계도 거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그 기도원에 간판이 피아노학원간판인걸 보았을 때 분명 마음 깊은 곳에서 여기 이상한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안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게 아니라면 그 불안함과 찝찝함이 분명 내 안에 있었다. 한 번씩 그 일을 생각하며 내가 도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할 때가 있다. 그건 혹여 기도를 하지 않고 돌아가서 여동생이 혹은 남동생이 조금이라도 안 좋은 일을 겪었을 때 기도를 하지 않은 나 자신을 원망할까 봐 불안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나 자신을 위해 알면서도 속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이 생각 또한 나의 멍청함을 포장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요새 우리 동네는 회사원이시죠? 대학생이시죠?라는 멘트를 하는 놈들이 있다. 가끔 지나가면서 누가 저런 거에 속아 라는 말이 귀에 들려온다. 내가 속았다. 기가 막히게도 속는 사람들이 있으니 저놈들도 신발이 닳도록 길거리에서 판단력이 없는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판단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덮어씌우는 진정한 거리의 귀신들. 아무리 마음이 힘들어도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절대 속지 마시기를. 한분이라도 이 글을 통해 속지 않았다면 그나마 내가 당한 일이 덜 억울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혼 축하해 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