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찬이는 취미로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부터 축구를 했다. 축구를 하고부터 변화된 아이의 긍정적인 모습에 2학기가 시작되었을 때도 축구를 했다. 물론 아이의 의지가 컸다. 손바닥에 흙이 조금만 묻어도 털어내며 깔끔을 떨던 아이다. 손을 씻다가 옷에 물방울이 조금만 튀어도 옷을 갈아입던 아이다. 사내아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슬슬 걱정되던 시점이었다. 코로나라는 혹독한 터널을 지 나온 탓에 손의 청결에 있어 예민하게 반응했고 미세먼지와 황사로부터 걱정이 많은 엄마로 인해 외출 후 돌아와 모든 옷을 벗는 것이 몸에 베인아이였다.
축구를 하고부터 흙바닥에 넘어지고 손에 흙이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땀을 흘리고 흰색스타킹이 더러워져도 재빠르게 일어나 뛴다. 건강해 보였다. 지쳐서 숨을 몰아쉬어도 행복한 얼굴이다. 딱 그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어느 날 2학년 꼬맹이가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꽤나 진지했다. 그래봤자 2학년꼬맹이 일뿐이고 마술사. 댄스가수가 하고 싶다고 말할 때 역시 진지했으니 그 정도 일거라고 생각했다.
서점을 가서도 축구 관련책만 사달라고 했다. 눈썰매장도 키즈카페도 거부하고 잔디구장만 갔다. 일기에는 축구이야기로만 채워졌다. 머릿속에는 온통 축구로 가득 차있었다. 축구에 있어 진심이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태권도선수생활을 한 신랑은 운동선수의 고됨 혹독한 훈련과 좌절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에 비할바는 안되지만 나 역시 학창 시절 2년 동안 정구라는 비인기종목의 운동선수 생활을 했다. 매일 7시 집합 후 2시간의 훈련을 했다. 늘 1교시가 시작되고 나서야 교실에 들어갔다. 지각이 운동부만의 특혜로 여겨진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매일아침 7시 집합 후 훈련종료 동시에 수업을 참여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과도 같다. 하교시간 역시 빨랐다. 4시인걸 확인하면 수업도중 선생님과 눈인사를 나누고 가방을 한쪽어깨에 둘러메고 교실 뒷문을 스르륵 열고 나왔다. 늦게 오고 일찍 가는 나를 친구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너네 훈련 한번 해볼래?"
1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훈련을 못하겠다고 하겠지? 혼자 생각했다.
국가대표선수가 코치님으로 오신 정구부는 그야말로 힘든 훈련의 연속이었다. 코피를 쏟는 것쯤은 흔한 광경이었고 다리에 쥐가 나서 뛰다가 멈추면 20바퀴를 더 뛰게 하는 지옥훈련이었다. 그 보다 처참한 것은 비인기종목이라는 이유로 2년 만에 학교에서 정구부를 해체하라는 결정이었다. 유니폼을 방문에 걸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을 끝으로 평범한 여학생이 되었다.
신랑의 훈련강도와 합숙생활은 글로 담을 수도 없다. 해군을 전역한 신랑은 훈련소와 군대생활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 태권도선수시절의 코치님이다. 당시 코치님은 내가 길거리가 아닌 TV에서 본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라. 만나면 묻고 싶은 말이 많다.
시대가 바뀌어 운동선수에 대한 폭력이 사라지고 처우가 개선되었다 한들 운동선수로 살아남는 것은 힘든 일이다. 직접 경험한 우리 부부는 희찬이가 축구선수가 꿈이라는 것이 두려웠다. 다시 다른 꿈으로 갈아타길 바랐다.
희찬이가 소속된 fc는 집에서 가장 가까워서 보냈지만 우연찮게도 명문축구부였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테스트를 본 후 합격해야만 입단이 가능했다. 희찬이는 1학년때 테스트 없이 들어갔기에 자동으로 2학년 소속이었다. 어디를 가든 어디 소속이냐는 질문이 부모님들의 자연스러운 첫 대화의 시작이었다. 축구부 이름을 말하면 모두가 부러워했고 갑자기 희찬이의 축구실력을 높이평가했다. 어쩐지....라는 말과 함께. 희찬이가 테스트를 보고 들어간 것이 아니기에 부담스러웠다. 희찬이가 잘해도 못해도 신경이 쓰였다.
희찬이는 축구를 썩 잘하지 못한다. 타고난 재능이 없다. 초등 저학년은 재능이 실력에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몸집이 큰아이가 어깨로 밀면 나가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다리가 긴 아이가 축구공을 발로 빼내기 수월하다. 성장이 빠른 아이가 다리에 힘이 좋아 달리기 역시 빠르다. 희찬이는 몸집 도 작다. 성장 도 느리다. 칭찬할만한 것은 경기후반이 되어도 쉬지 않고 뛰는 체력과 정신력이다. 희찬이가 축구선수의 꿈을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은 본인이다. 본인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절대로 축구선수가 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 6월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축구의 기본이라고 불리는 볼 리프팅을 시작으로 개인훈련을 하기로 했다.
10세 아이 기준 노바운드 리프팅 10개 (이동국 fc의 유소년레슨 커리큘럼 참고)
팀훈련을 마치고 와서 저녁식사 후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을 이행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단 하루의 예외라도 생긴다면 축구는 취미로만 하자고 희찬이를 설득시켜 보려던 나의 속내를 신랑은 알고 있었다.
볼 리프팅 훈련
2023.06. 7 훈련 첫날 1 개 ( 1시간이나 훈련을 했지만 끝끝내 확실한 2개를 하지 못했다.)
2023.06. 8 훈련 2 일차 2 개 ( 공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오기가 생겨 재빠르게 주어 다시 찬다.)
2023.06.18 훈련 12 일차 10 개 달성 (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2023.07.07 훈련 31 일차 40 개 달성( 희찬이의 몸무게가 줄었다.)
2023.07.24 훈련 48 일차 105 개 달성 ( 폭염 속 땀으로 속옷이 젖도록 훈련을 하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2023.07.27 훈련 51 일차 114 개 달성 ( 더 이상 훈련을 지켜볼 수 없어 훈련은 아빠만 지켜보기로 했다.)
2023.07.28 훈련 52 일차 128 개 달성 ( 훈련을 중단하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2023.08.28 훈련 83 일차 213 개 달성 ( 축구공이 발등에서 저절로 움직인다고 한다.)
2023.09.12 훈련 98 일차 307 개 달성 (희찬이가 존경스러웠다.)
리프팅 307개를 하고는 옥탑방에서 아빠와 아들이 뛰어내려왔다. 다리힘이 풀려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지도 못하는 희찬이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차있었다. 100일 동안 훈련을 거부한 적 없이 2시간씩 훈련을 해서 이뤄낸 성과다. 살면서 내가 이뤘던 그 어떤 성취의 순간 보다 가슴이 뜨거웠다. 그날 희찬이의 일기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리프팅을 한 개도 못하던 내가 300개를 넘게 했다. 내가 자랑스럽다. 나는 나를 믿고 아빠도 나를 믿는다.
작년 여름 여러 이유로 명문 fc에서 축구부가 소속되어 있는 작은 학교로 옮겼다. 축구부 훈련시간이 길어 개인훈련은 30분으로 줄였지만 여전히 볼컨트롤 훈련을 매일하고 있다.
희찬이의 열정과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게 서포트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을 안다.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 선택한 꿈 이기에 비록 좌절을 맛보더라도 오롯이 그것은 희찬이의 몫이라는 것도 안다. 솔직히 그 길이 두렵다. 본인의 신체적 불리한 조건을 알고 미흡한 점을 채워나가는 희찬이가 안쓰럽지만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