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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채 Nov 23. 2023

엄마의 가방

보부상

친정엄마와 같이 살고 있지만 나들이 한번 같이 가기 어렵다. 사회생활을 활발히 하는 엄마는 모임과 약속이 많은 편이다. 아이가 축구를 하고부터는 스케줄을 맞추기가 더 힘들어 기념일이 아니고는 나들이가 어렵다. 그러던 중 마침 축구부훈련이 없는 날 엄마도 스케줄이 펑크 나서 집에 있었다. 신랑은 밀린 업무가 있으니 일을 하라고 한 후 친정엄마와 나 아이 셋이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나들이를 나섰다. 아이와 신랑 없이 둘이 외출을 하는 일도 흔치 않은데 친정엄마와 함께 셋이 하는 외출이라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외출이다.


지하철까지 셋이 손을 나란히 잡고 걸어가는데 괜스레 뭉클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 기분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그 감동만 일단 기억해내려고 한다. 나와는 성향이 서로 너무 다른 엄마와 같이 살기로 한날부터 우린 톰과 제리 마냥 부딪히며 살고 있다. 그래도 엄마와 나들이를 갈 수 있는 건 늘 딸과 손주를 챙겨주려 하는 엄마의 지극함 때문일 것이다.

목적지로 향하는 지하철이 오려면 5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아이와 손가락으로 하는 젓가락게임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 무릎 위에 올린다. 지퍼를 열더니  주섬주섬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고 노랗게 잘 익어 보이는 귤세개를 꺼내 나에게 하나를 건네준다.

"귤을 왜 갖고 왔어? 가서 밥 먹을 건데. 굳이. 무겁게." 퉁명스러운 나의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귤을 까서 손주입에 넣어주고 당신도 껍질을 까서 반으로 가르더니 입에 먹어 치운다. 그리고는 물티슈로 손주손을 닦고 당신 손에 묻은 귤즙을 닦아내더니 가방에 넣는다. 양치하고 나온 지 30분이 채 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먹고 싶않은 나는 엄마에게 귤을 다시 돌려주었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탑승했다. 친정엄마는 환갑을 훌쩍 넘은 여성의 미모로는 보이지 않는 세련미가 있지만 지하철 탑승 후 한국아줌마 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스캔 후 재빠르게 두 자리를 확보하는 순간이다. 엄마와 아이를 앉게 하고 아이 앞에 서있었다. 갑자기 엄마가 나의 코트소매를 보며 뭐 하나 잘 걸렸다는 표정이다. 우리 모녀관계에서 톰 역할을 맡고 있는 나와 제리역할을 맡고 있는 엄마와의 전세가 역전될 경우 엄마에게 나타는 표정이다.


"세상 깔끔한 척하는 애가 실밥을 달고 다니네 나오기 전에 거울 안 봤어?"


코트 소매에 hand made라는 상표의 실밥이 살짝 풀려 실이 덜렁덜렁 휘날리고 있었다. 뜯으면 코트의 올이 나갈 것 같아 순간 이를 어쩌나 하는 찰나 엄마는 가방지퍼를 연다. 서서 보니 엄마의 가방이 훤히 보인다.
꽃무늬 모양의 파우치 3개. 물티슈. 생수 한 병. 내가 까먹지 않고 돌려준 귤. 우산이 보인다. 방금 전 공격을 받은 만큼 나도 공격을 한다.

"무슨 가방에 짐을 그렇게 많이 넣고 다녀? 도대체 그게다 뭐야? 그러니까 어깨가 아프지"


엄마는 대꾸를 하지 않고 손때가 묻은 파우치 하나를 꺼내어 지퍼를 열더니 쪽가위를 꺼낸다. 내 코트소매의 실밥을 덜컹 거리는 지하철에서 수술 후 꼬맨실밥을 제거하는 의사처럼 신중하게 집중하더니 단번에 적당한 선에서 잘라냈다. 40년 전 미싱일을 했었다는 엄마의 말이 사실이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다.

그제야 만족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엄마는 다시 한 소리한다.


"내가 이렇게 들고 다니니까 너 칠칠치 못하게 실밥 안 달고 다녀도 되잖아? 고맙다고 해야지. 그렇지? 희찬아?"

나의 떨떠름한 표정을 피해 희찬에게도 시선을 돌린다.

갑자기 엄마의 가방이 너무 궁금해진 나는 파우치의 내용물을 꼬치고치 캐물었다.

단추가 떨어질 때를 대비해 바늘과 실 쪽가위.

화장이 지워질 것을 대비해 선크림과 립스틱 거울.

목이 마를 때를 대비한 생수.

입이 심심할 때를 대비한 목캔디와 껌.

머리가 아플 때를 대비한 타이레놀.

동전이 필요한 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500원짜리 동전들.

물티슈 우산 귤.


엄마의 가방을 들어 올려보니 한쪽어깨로는 멜 수 없는 무게의 가방이다. 엄마는 찌푸려지는 내 미간을 보더니 한마디 한다.

"나도 너처럼 애가 하나면 이렇게 안 갖고 다녀. 나도 아가씨 때는 안 그랬어. 너네 셋 키우면서 이렇게 들고 다니기 시작한 거야. 뭐 하나 안 갖고 나오면 꼭 필요한 일이 생겨서 후회하니까."

그즈음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안내멘트가 나왔고 아이의 손을 잡고 하차했다. 교통카드를 꺼내려고 하는데 가방에 짐이 많아 바로 카드지갑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가방에는 희찬이가 혹여 넘어질 때를 대비한 밴드와 소독약. 소독티슈. 지갑. 생수. 아이입술에 수시로 발라주는 입술보호제. 아이의 여분 마스크. 목마르다고 할 때를 대비한 생수. 심심할 때를 대비한 큐브. 모기 물리면 발라주는 연고가 들어있다. 나의 가방 역시  짐이 많은 편이었다. 늘 신랑과 자동차로 이동하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된 날이라 외출 전 심사숙고 끝에 챙긴 내 가방 속 물건들 역시 친정엄마의 가방을 닮아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엄마의 가방 안 물건들은 어릴 적부터 아이 셋을 데리고 외출하던 엄마의 지극한 보살핌이었다. 39년 전부터 엄마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가방은 우리 삼 남매의 칠칠맞음을 묵묵히 해결해 주는 지극 함이라는 걸 못난 딸은 이제야 알았다. 어릴 때는 엄마의 가방을 고맙게 생각한 적이 있을까? 그 또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지금의 나의 아이가 나의 가방을 고마워하지 않음에도 아이를 위한 짐을 챙기는 나와 같겠지.


안목이 있는 여동생이 명품가방을 사다 줘도 무겁다며 엄마는 메지 않는다. 가방의 무게만이라도 줄이려는 심산인 것이다. 세련된 옷을 즐겨 입는 친정엄마의 옷들과 어울리지도 않는 가방이다. 내가 상큼한 가방을 포기하고 짐이 많이들어가는 가방을 선택하는 것 처럼 말이다. 엄마의 보부상가방을 이제야 이해한다. 엄마의 가냘픈 어깨 만큼 이나 가방의 어깨 끈이 위태로워 보인다. 가방끈이 떨어지기 전 이번에는 여동생보다  내가 먼저 엄마의 가방을 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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