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웨이는 불문율이 많은 여행법이다. 아무도 대놓고 명시하거나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워커웨이어와 호스트 사이에서 상호기대되는 기본적인 수준의 배려와 인정을 바탕으로 굴러간다.
워커웨이어는 호스트가 집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항시 기억하고 기본 매너(하우스룰)를 지켜야 하며 요리, 설거지, 본인 방과 공용공간 청소 등 기본적인 집안일에 참여한다. 호스트에게 급히 도움이 필요하다면 주 25시간에 관계없이 일을 더 해주기도 하고 다른 워커웨이어들을 불쾌하게 할 일 없도록 주의한다(당연한 얘기인데 안 지키는 사람들도 있다).
호스트는 워커웨이어에게 과도한 일을 시키지 않고 워커웨이어가 갑자기 아프다면 쉴 수 있게 해준다. 워커웨이어가 열심히 일해주는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방과 음식 제공 외에도 가끔 지역 명소에 데려가 주거나 근처 맛있는 식당 또는 펍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더 마음을 쓴다면 예약을 해주거나 같이 가주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워커웨이어가 호스트 집에 도착하는 날과 다른 곳으로 출발하는 날에는 보통 일을 빼준다. 도착하는 날은 일단 오후에 도착할 때가 많아 일을 할 시간이 없기도 하거니와 대부분 시골이나 구석으로 들어가야 하는 호스트들의 집 특성상 거기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여독이 상당하다. 긴 이동으로 피곤하고 짐도 풀지 않은 상태에서 첫날부터 일을 시키는 건 좀 그렇다.
다른 곳으로 출발하는 날에는 마지막으로 짐을 싸고 정리한 후 사용하던 방을 청소해야 한다.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교통편을 잡기 위해 멀리 떨어진 도심까지 나가야 하기 때문에 주로 오전에 집을 나선다. 그래서 보통 분주하고 정신없고 바쁘다. 이제 가는 사람인데 붙잡고 일을 더 시키는 것도 뭐하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는 마리의 집이다. 마지막 날까지도 7시 30분에 일을 시작해서 평소 하던 말똥 치우고 동물들 밥 주고 산책갔다가 아침상까지 치운 후에야 내 짐을 꾸릴 수 있었다. 마리 남편이 출장 간 상태라 내가 일을 더 해주는 게 물론 좋겠지만 그녀가 마지막 날까지 당연하다는 듯 이것저것 부탁하고 감사 인사 한 마디 않는 것은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마리는 한달 전 내가 기차를 타고 도착했던 역으로 태워다주었다. 우리는 기차역 플랫폼에 어색하게 서서 기차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래된 시골역의 플랫폼은 아무 장식도 안전장치도 없이 그저 철로보다 조금 높은 돌단이었는데 밋밋한 단상 같아보였다.
철로를 향한 상태로 양옆을 쳐다보면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 좌우로 뻗은 기찻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3분 남짓한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하늘은 맑았고 2월 중순의 찬 공기는 팔에 소름이 돋게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플랫폼에는 우리 둘뿐이었는데 휭, 하고 황량한 바람이 몸을 스쳐지나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 단상 같이 생긴 플랫폼 위가 마리에게 미루고 미뤄 온 ‘앞으로 워커웨이어 더 받지 마시라’고 말할 마지막 기회였지만 입을 열 용기가 도무지 나질 않았다.
마리, 당신은 똑부러지는 사업가고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 점을 존경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면모가 워커웨이 호스트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워커웨이어는 잘 곳과 음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당신의 일을 돕지만 그게 당신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우리는 일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여행자에요. 여행을 하기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일을 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랍니다. 그걸 헤아려줬으면 좋겠어요. 물론 일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할 거에요. 우리는 당신의 일을 존중하니까요. 그러니 당신도 우리의 일인 여행을 존중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사람도 존중해주세요. 사람이 동물과 일할 때는 안전 문제가 발생하기 쉽죠. 특히 섬세한 동물인 말과 지낼 때는요. 그에 대해 미리 우리를 교육해주신다면 동물뿐 아니라 사람도 안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들 중 대다수는 당신만큼 동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답니다. 세 마리의 말과 태어난 지 두 달 된 새끼 강아지를 돌보라는 설명없는 명령 대신 동물도 안전하고 사람도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지금 와서야 생각해본다. 영어로 횡설수설할지도 모르고 마리의 기에 눌려서 제대로 입밖으로 꺼내지도 못했을 확률이 높지만 가끔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이 순간이 생각난다.
어색함에 괜히 캐리어 손잡이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그녀와 처음이자 마지막 포옹을 한 번 나누고는 잘 있으라는 인사를 끝으로 기차에 올랐다. 점차 속도를 올려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창밖으로 그렇게 떠나고 싶어했던 동네가 멀어지는 걸 보았다. 거기서 어떻게 한 달이나 있었던 건지,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걸 느끼며 그렇게 마리의 동네를 떠났다. 점점 뮌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 문제라면 내가 뮌헨을 그렇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뮌헨 중앙역에 오후 두 시에 도착했지만 피렌체로 떠나는 버스는 당일 밤 아홉 시에 있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중앙역에는 짐을 보관할 수 있는 락커가 있었는데 비어있다는 표시가 되어있는 칸은 아주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용할 수 있는 열쇠가 꽂혀있는 칸은 별로 없어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처럼 헤매고 있는 미국인 여행자에게 물어 같이 헤맬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26인치 캐리어가 들어가는 칸은 다 내 머리 높이밖에 남지 않았는데 내 힘으로는 그 높이까지 들어올릴 수 없었다. 미국인 여행자는 이미 떠난 후였고 옆에서 볼일 보다가 나를 발견한 한 아저씨가 와서 도와주셨다.
동유럽과 북유럽까지는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대체로 모르는 사람이 낑낑대고 있으면 바로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내 경우에는 특히 아저씨들이 그렇게 도와주셨다. 중학생처럼 생긴 애가 몸 만한 캐리어 들어보겠다고 애쓰는 게 안쓰러워 보였던 걸까.
원래 내가 들 수 없는 무게의 짐을 들고 여행하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해서 여름에 1차 출국했을 때는 18인치 조막 만한 캐리어에 가벼운 짐을 챙겨들고 떠났지만 생활하다 보니 역시 18인치는 무리였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결국 현지에서 부족한 것들을 잔뜩 사게 되더라. 이번에는 더군다나 부피가 두 배인 겨울옷을 챙겨가야 했기에 결국 내가 들 수 없는 26인치 캐리어를 가져가게 되었다.
파리 TGV 기차는 짐을 열차칸 양끝 보관대에 올려놓아야 하는데 아랫칸에 자리가 없으면 머리 높이의 보관대에 캐리어를 들어서 올려야 한다. 내 뒤를 따라오는 줄을 의식해서 어떻게든 들어보려고 온몸에서 힘을 뽑아내고 있었지만 도저히 무릎 위로는 들 수가 없었다. 낭패다, 완전 민폐잖아, 생각하던 그때 내 뒤에 서 계시던 한 아저씨가 내 짐을 번쩍 들어 머리 위 보관대에 올려주셨는데 민폐가 된 것 같아 죄송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도와주신 게 감사했다.
메흐시 하고 인사했는데 아저씨는 고개 한 번 끄덕이시더니 자기 자리로 떠나셨다. 다들 생색은 안 내는데 이런 식으로 도와주는 게 몸에 배어있는 것 같다.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몇 초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문을 잡아준다거나 짐을 들어준다거나 하는 일이 아주 당연해보인다. 한국에도 물론 그런 문화가 있지만 여기는 정말 즉각 도움을 준다. 누가 조금만 힘들어하는 게 보이면 자기 불편을 감수하고 나서서 도와준다. 그게 너무나 당연해서 생색도 안 낸다. TGV에서 내릴 때는 내가 캐리어를 내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또 한번 도와주셨다. 차가운 듯 따뜻한 사람들이다(물론 개중에 도둑도 있다. 짐 들어주는 척 하다가 캐리어 들고 튀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뮌헨 락커에 짐을 넣고 열쇠를 단단히 말아쥐었다. 이 열쇠를 잃어버린다면 피렌체행 버스도 놓칠 것이고 무엇보다 역보관소 사무실에 가서 이러저러해서 열쇠가 없어졌는데 열어줄 수 있냐고 부탁해야 한다. 캐리어에 네임택은 붙어있으니 여권의 이름과 네임택의 이름이 같다는 걸 어필해서 내가 이 락커의 주인이 맞다고 증명은 할 수 있어서 다행인 건가. 만약 증명할 방법조차 없었다면 으, 생각만 해도 귀찮아서 무섭다. 그러니 뮌헨역 락커에 짐을 넣는다면 열쇠는 잘 챙기고 캐리어에는 네임택을 달아놓도록 하자.
버스가 오는 정류장은 뮌헨 외곽에 있어서 좀 걸어야 했고 분명히 어디서 타는 건지 헤맬 게 분명해서 일찍 출발해야 하는 걸 감안한다면 가까운 뮌헨 시내 구경이 최선인 것 같았다.
시내에는 여행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큰 쇼핑몰도 있었고 펍과 글로벌 프랜차이즈 매장들, 아시안이 운영하는 식당들도 있었다. 마리네 집에 가기 전 뮌헨을 같이 구경했던 한국인 동행분은 뮌헨 아시안 식당 한켠에서 파는 흑당 버블티가 한국 버블티 맛집 뺨칠 정도로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우셨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곳에서 뭔가를 체험할 정도의 정신적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아서 어디서나 같은 음식, 같은 퀄리티, 같은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는 그저 그렇고 지루한 글로벌 프랜차이즈 중 한 곳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곧바로 글로벌 프랜차이즈라고 해서 다 같은 서비스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한국의 KFC를 기대하며 뮌헨 KFC에 들어갔다. 번화가 프랜차이즈 매장이 그렇듯 아주 바쁘고 어수선했다. 주문을 받는 곳과 음식을 주는 곳이 달랐고 주문 받을 때 주는 번호표를 보고 음식을 찾아가는 흡사 스타벅스 같은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주문을 받는 직원 앞에 섰을 때 예상치 못한 불친절함에 놀라고 말았다.
나도 현재 서비스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고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이 항상 웃고 친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기 직원의 불친절함은 한국인으로서 상상도 해보지 못한 정도였다.
그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내 영어가 원어민 발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디 가서 발음으로 뒤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못 알아듣겠으니 말 좀 똑바로 하라는 태도에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주문을 받으면서도 계속 다른 곳을 쳐다보고 내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자기가 다른 데를 보느라 못 들은 말을 내 발음 탓으로 돌렸다. 말을 툭툭 뱉는 것은 기본, 계산이 끝나자 주문번호가 적힌 종이를 내 앞에 휙 던졌다. 내 뒤 백인 손님에게도 그러는 것을 보니 인종차별인 것 같지는 않았고 그냥 이런 게 당연한 듯 했다.
말해 뭐하리, 조용히 내 앞에 툭 떨어진 종이를 주워서 조금 기다리다 음식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한 입 베어문 치킨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겉 튀김옷은 눅눅한데 속은 느끼하고 퍽퍽했다. 한국 치킨이 맛있다는 이야기는 하도 들어 그런가보다 했는데 설마 외국 KFC가 이 정도로 맛없을 줄은 몰랐지 뭔가. 한국에는 맛있는 치킨 브랜드, 개인 치킨집들도 많고 KFC도 점포가 많지는 않지만 그 중에서 그래도 살아남고 있을 정도의 맛과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다. 엄청난 변주까지는 없더라도 겉바속촉이라는 치킨의 기본기는 충실하게 지키고, 어느정도 팬층이 있을 정도의 맛인데 뮌헨 KFC는 충격적이었다.
한국 치킨이든 뮌헨 치킨이든 어차피 닭이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뮌헨에서는 닭을 죽여 얻은 살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이건 치킨이 되는 닭에 대한 도리가 아닐 정도로 무의미한 맛이었다.
육식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치킨을 자주 먹기는 부담스럽고 누구에게 치킨 먹으라고 권할 수도 없지만 귀국하고 나서는 '한국에서 치킨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자' 하는 요상한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렇게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잠깐 뮌헨 시내를 정처없이 떠돌다 대형 서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에코백과 마그넷, 펜 같은 평범한 서점 굿즈들도 있었고 2층 구석까지 가보면 영어 책도 찾을 수 있었다. 세계여행 코너에는 한국에 관한 책도 있었다.
《KOREA 151》이라는 책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한국 음식, 장소 등을 키워드로 잡아 관련 문화를 설명하는 책이었다. 초코파이, 빙수, 헬조선, 노래방 등을 볼 수 있었는데 온통 독일말이라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헬조선 페이지를 찍은 사진을 가지고 이미지 속 글자를 추출하는 휴대폰 기술을 통해 번역기를 돌려보니 한국의 수저론, 경제 격차, 사회적 소외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헬조선이라는 글자 오른쪽에는 등이 굽은 채 쓸쓸하게 역 바닥에 앉아있는 듯한 사람의 뒷모습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헬조선이 한국을 대표하는 키워드 중 하나로 독일 책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빡빡한 유교 문화와 경제 양극화에 젊은 세대의 반이 이민을 희망한다는 내용도 눈에 띄었다. 헬조선에 이은 탈조선이다.
한국은, 특히 서울은 빠른 변화속도가 자랑거리다. 트렌드의 첨단에 서서 폭풍 같은 유행들이 지나가는 것을 관찰하고 또 몸으로 겪어내는 곳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경제와 문화가 단기간에 급성장했다고 할 수 있지만 한 세대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너무 커서 오히려 새로 태어나는 세대는 자기가 나고 자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류층과 큰 문화·경제 격차를 경험하는 것은 아닐까.
나도 2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세대지만 지금 고등학생들과는 또 엄청난 차이를 느낀다. 문화적으로는 '탈유교'가, 경제적으로는 '수저결정론'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수저론이 대두된 지도 꽤 오래 되었고 오히려 인터넷 기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창업을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수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일견 진부해보이기도 한다. 사회 주류로 편입되는 길이 조금 늘어난 것도 같다.
하지만 새로운 방법조차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자본 또는 교육자본, 좋은 대학교 간판을 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십대 때 한번 삐끗하거나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데 인색한 한국 사회에서는 본인의 수저를 뒤집기 위해 마지막 빵조각을 걸고 모험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동수저가 은수저 되기는 조금 쉬워졌을지 몰라도 흙수저가 동수저 되기는 여전히 힘든 곳이다.
문화도, 주력 산업도, 정치도, 모든 환경이 한국과 달라서 그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덴마크 친구의 한 마디가 생각난다.
"You can't really lose here."
어떻게 해도 질 수 없다는, 그 한 마디가 참 씁쓸하게 부러웠다.
버스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남겨두고 다시 뮌헨 중앙역 락커로 향했다. 락커 번호를 사진으로 찍어두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늦은 밤 버스 터미널에는 밤 버스를 타고 자면서 이동하려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오스트리아를 거쳐서 피렌체까지 내려가는 버스는 장장 10시간 동안 달려 다음날 아침 7시에 피렌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버스는 뒷쪽에 화장실까지 달린 덩치 큰 2층 버스였다. 제대로 쉴 곳도 없이 한나절 동안 돌아다니다보니 그 거대한 버스가 달리는 침대처럼 보였다. 2층 창가에 위치한 자리는 불편하고 좀이 쑤셨지만 곧 잠이 들 수 있었다.
좋아, 이대로 정신 한 번 잃었다 눈 뜨면 이제 뮌헨 탈출, 피렌체 도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