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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Jul 07. 2015

청춘아, 조용히 웃을 때가 되었다

- 나의 이탈리아 와인 연애기 (1)



때로 독학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전을 깊숙하게 읽어야 할 때나 맛을 느껴야 하는 일을 할 때가 그런 상황이다. 오랜 기간 연구하고 체험하며 뼈대를 세운 사람의 내공을 전해 받아야 제대로 이해가 가능하기도 하고 직접 접해보지 않으면 몸이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말 집 근처에 있는 와인 할인매장의 특별행사장을 들렀다가 친숙하고 낯익은 와인이 몇 병 보여 뒷자리에 옮겨 실었다. 와인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던 날들의 추억을 싣고 왔다고 할까.    

 

한 칠, 팔 년 전이었던 것 같다. 첫 직장을 아직 떠나기 전 우연히 알게 된 인터넷 광고는 가슴을 적잖이 두드렸다. 와인에 대한 관심에 막 눈뜨기 시작할 때였을 것이다. 수입사가 개최한 와인 강좌를 아내의 허락을 어렵사리 얻어내 토요일마다 신사동으로 향했다.     


이탈리아 와인 전문 수입사였던 그곳은 내게 신천지 같은 곳이었다. 와인으로 들어가는 세계를, 품종과 양조방법을, 맛을 대하는 문화 등 다양한 것들을 내게 던져줬다. 덕택에 이탈리아 와인에 대한 평생의 즐거움을 얻게 된듯하다.     


불행하게도 이후 그 수입사는 사라졌고 동향의 대표분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흑석동 어딘가로 사무실이 이전했다고 전해 들었지만 수입하던 대표 와인들도 이제 다른 곳이 대행하고 있다. 그저 젊은 날의 추억이 되었다.     


  “솔라라는 랑게와 몬페라토의 경계에 있어요. 아주 아름다운 곳이죠. 가보면 아실 거예요.”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계속 높아지는 오르막을 타고 몬페라토에 들어온 모양이다. 내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언덕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포도밭의 꽃망울 축제가 한창인 별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1부 4장, 나는 혼자서 도시로 떠난다 中.     

  역행성 기억 상실증에 걸린 잠바티스타 보도니(일명 얌보)는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솔라라에서 안개 속에 갇힌 자신의 기억을 찾아 나선다. 그는 헌책방을 운영했던 할아버지의 온갖 수집품들 속에서 이탈리아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시대로 시간여행을 체험하게 된다. 에코의 소설은 피에몬테(Piemonte)의 구릉지와 포도밭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토스카나 지방과 더불어 이탈리아 명품 와인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피에몬테 지역은 네비올로(Nebbiolo) 포도로 유명하다. 바롤로(Barolo)와 바르바레스코(Barbaresco) 와인 등 프랑스에서도 인정하는 묵직한 와인을 만드는 포도로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품종들이다. 반면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감당하기 힘들고 데일리 와인을 만드는 정도로만 치부되던 바르베라(Barbera) 포도는 그 신맛으로 고급 와인을 만들기는 불가능한 포도로 치부돼 왔다.     


그 바르베라 품종을 고급 와인의 대열에 합류시킨 와이너리가 쟈코모 볼로냐의 브라이다(Brida)社이다. 쟈코모 가문에 의해 바르베라도 품격을 가진 와인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됐고 지금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수마(Aisuma)와 같은 값비싼 와인도 있지만 일 바치알레(IL Baciale)와 같은 대중적인 와인도 생산된다.  

   

몬페라토 DOC에서 생산되는 이 와인은 바르베라 60%에 피노 네로 20%, 카베르네 쇼비뇽과 메를로가 각각 10% 배합된다. 스틸 탱크에서 알코올 발효가, 그리고 나무통에서 젖산 발효가 진행된다. 작은 오크통에서 12개월 동안 숙성되고 병입 후 6개월간 다시 진행된다. 강렬한 루비 빛깔을 보이고 스파이시한 향과 블랙베리류의 맛, 후추, 시나몬 맛을 느낄 수 있다.     


피에몬테 지역 방언인 일 바치알레는 지역 귀족 가문사이의 혼인을 조정하던 사람, 중매쟁이를 묘사하는 말이다. 바르베라와 다른 포도 종류를 배합해 만든 와인을 설명하는 단어로 어쩌면 이보다 더 훌륭한 선택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와인의 세계로 이끌어준 중매쟁이이기도 한 셈이다. 과장된 과묵함도 없고 바르베라 고유의 맛도 적절히 느껴볼 수 있는 추억의 와인이다. 좌충우돌 청년이 단단한 성년으로 성숙해가는 느낌이랄까. 초여름 밤 그대와 함께 잔을 부딪치고 싶다면 중매쟁이를 불러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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