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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Jul 12. 2015

왜 책을 읽을까, 글을 써야 할까

딸에게 쓰는 편지 (1)

두 가지 질문이 우리 앞에 있다.     


첫 번째는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하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글은 왜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책을 읽으라는 소리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들어온 이야기다. 아마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어른들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은 책을 일 년에 한 권을 읽을까 말까 한 사람조차도 자기 자식들에게는 독서를 강요하고 있다. 왜 들 그러는 것일까.


대부분의 어른들은 두 가지 오류를 가지고 있다. 먼저 책을 읽는다는 것이 공부, 아니 학습의 연장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책을 읽어야만 지식이 쌓이고 좋은 점수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들이 커오면서 그렇게 들어왔고 경험이 그것뿐인 까닭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책을 읽음으로써 자기계발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또한 어떠한 책인가도 중요하다. 그저 읽기에 편하고 즉물적인 지식을 전달해 주는 책을 읽는 행위만으로 자기계발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여기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기계발은 처세술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 것일까. 그건 책 읽기가 만만치 않다는 뜻이고 노력이 요구된다는 증거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삶을 온전히 살아내겠다는 뜻이다. 내 앞에 촘촘히 짜여진 세상, 혹은 사람을 제대로 읽어냄으로써 나의 생각을 바르게 세우고 온전한 행동으로 살아가겠다는 자세를 견지하는 행위다. 인문학자 강유원선생의 말처럼 “병든 사자만 풀을 뜯”고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 것이다.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자각이 없이 책 읽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노력이 필요하며 단련이 이어져야 하고 반복적인 체화과정 또한 필요하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연마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읽는 힘을 키우고 책을 보는 안목도 넓혀가야 한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제대로 된 책 읽기를 하지 않아도) 세상을 사는데 하등 지장을 받을 일은 없다. 이미 공고한 자신들의 체계를 구축한 자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그대로 맞추어 살면 책 따위는 사실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내게 허락된 수십 년의 삶을 똑바로 바라보고, 살고 함께 나누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다소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인식이 있는 경우에야 우리의 책 읽기가 시작된다. 따뜻한 난방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은 후에야 책 읽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읽기는 내가 사는 세상이 일직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 길을 구르고 뛰며 살아가는 일에서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또한 주류사회가 만든 세계에 더 이상 맞춰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책은 다 책이 아니고 책 읽기는 모두 같은 책 읽기가 아니다. 다소 지적 허영일 수도 있어도 괜찮다. 그러면서 시작해도 제대로 읽다 보면 바로 잡게 되는 날이 온다. 지금 걱정할 일이 아니다. 방법은 차차 같이  이야기하며 바꿔가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책을 읽어가는 노력에 도전하겠다는 의지의 첫출발이다. 누구나 바뀌고 돌아선다. 중요한 것은 다시 돌이키고 결국 멀리보면 같은 선 안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후회하지 않는 마음을 건져내는 것이 우리가 진행하는 책 읽기의 목표이다. 이런 자세를 가지며 살아간다면 좀 더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글은 왜 써야 할까.

여기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한 가지는 내가 읽어낸 세상이 올바른 것인지 확인하고 정리하는 목적이다. 글로써 정리할 수 없다면 그것은 헛생각이다. 물론 나만 알아먹을 수 있는 정리가 아니라 남들이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정리여야 한다. 나만 알아먹는 것은 단순 기호일 뿐이다. 대중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과학자이고 인문학자이고 미술가이고 음악가이다. 교수이고 박사일지는 모르나 제대로 된 학자요 실천가는 아니다. 그 분야에 대해 온전한 이해가 있어야만 글쓰기가, 남들이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글이 될 수 있다. 현학적인 지식을 남발하는 필자는 그 분야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고립된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사람들은 그래서 글도 잘 쓴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훈련을 했고 자기의 생각이 완전해졌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우리는 흔히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글을 접하게 된다. 도대체 알아먹을 수 없는 얘기, 횡설수설해서 더 헷갈리게 하는 설명, 문법에도 맞지 않는 문장, 두 줄로 줄여도 될 내용을 두 단락이나 설명하는 글들.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이고 글쓰기 훈련이 되지 않아서이다. 


그 다음은 정리가 이루어지고 난 후 설득의 단계이다. 설득이라고 하니 대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마다의 관계는 모두 설득의 관계다. 우리가 흔히 소통이라고 하는 것도 나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상대방이 마음으로 허락한 것이다. 나의 정신이 상대방의 정신을 설득한 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관계이지 소통은 아니다. 소통이 이뤄지면 마음이 편하듯이 좋은 글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연애편지를 왜 쓰는가? 나의 생각이 그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 아닌가. 미사여구를 집어넣었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이 설득당하겠는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잘 정리해서 잘 훈련된 글쓰기로 무난하게 전달했을 때 상대방이 설득당할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책을 읽었으면 제대로 글로 표현할 줄 알아야 우리의 공부가 완성되는 것이다.


좋은 글은 나만의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아가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인간다운 삶이다. 가장 선한 삶은 돈을 기부하고 철마다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타인이 바라보며 배워가고 그 사람을 또 다른 사람이 배워가는 출발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고 고단하지만 한평생 제대로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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