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탈리아 와인 연애기(2)
오래전 보았던 애니메이션을 다시 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형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영화 <붉은 돼지>. 여자 아이, 비행기, 낭만적 낙관주의, 유럽, 수면 위로는 올라오지 않는 피해의식. 어찌 되었건 어느 악당도 무조건 나쁘지 않으며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의 우격다짐 때문에 세상이 힘겨울 때면 자주 꺼내보는 영화죠.
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는 실업과 인플레이션, 좌우익의 분열로 파시스트의 발호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최고의 공군 조종사였던 마르코 파곳(Marco Pagot)은 전쟁과 끝없는 욕망의 추구로 점철되는 파시스트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돼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현상범 사냥꾼이 되어 살아갑니다.
영화에는 푸른 아드리아해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며 병풍처럼 서있는 아펜니노 산맥 아래에서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이 펼쳐집니다. 그는 아드리아해의 어느 무인도에 기거하며 라디오를 듣거나 와인을 홀짝이며 세월을 건너뜁니다. 그 무인도가 크로아티아의 두브 로브니크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배경이 이탈리아이고 보면 동부 해안 어느 도시, 앙코나나 아브루쪼 지역이 주 배경이라 저는 짐작하곤 합니다. 영화에서 공적(空賊)의 표적이 되는 크루즈선들이 그곳 항구에서 그리스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치채셨군요. 오늘은 그 지방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포르코 로쏘(Porce Rosso)가 마시던 와인은 십중팔구 폰테풀치아노(Montepulciano) 일 겁니다.
동부 해안 지역을 살펴보기 전에 포도 품종인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 합니다. 토스카나 지방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몬테풀치아노라는 단어는 토스카나의 유명한 와인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Vino Nobile di Montepulciano)'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는 산지오베제의 형제 품종인 프루놀로 젠틸레(Prugnolo Gentile)로 만들어지는 토스카나 지방의 와인 이름이고, 포도 품종 몬테풀치아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몬테풀치아노 품종은 다소 고온 건조한 기후와 적당한 밀도를 보이며 일조량이 좋은 토양을 선호합니다. 단일 품종으로 양조될 경우 진한 루비색에 과일향과 타닌이 조화로운 균형을 가집니다. 몬테풀치아노는 로마냐에서 토스카나, 마르케, 움브리아, 라치오, 시칠리아까지 중남부의 대부분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아브루쪼, 마르케, 몰리세에 집중돼 있습니다. 옛날에는 끼안티 제조에도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산지오베제와 바르베라와 함께 이태리 3대 多생산 품종입니다. 몬테풀치아노는 2차 대전 이후 토스카나의 몬테풀치아노 지역에서 일하다 고향으로 돌아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탈리아 동부 해안 지역에 대대적으로 심겨졌고 그래서 이름을 몬테풀치아노라고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만 증거는 없습니다.
앙코나(Ancona)가 주도인 마르케는 해안선을 따라 위로는 에밀리아 로마냐, 아래로는 움브리아, 아브루쪼와 인접해 있습니다. 앙코나(Ancona)는 이탈리아 동해안 일대에서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해안선을 지닌 곳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아드리아해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가면 그리스에 닿게 됩니다.
마르께와 남쪽으로 바로 맞닿은 아브루쪼는 현대 이탈리아의 극우 보수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가 태어나서 작품 활동을 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아드리아해를 끼고 길게 이어져있는 아브루쪼는 두 가지의 전통적인 와인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몬테풀치아노라는 레드 품종과 트레비아노(Trebbiano)라는 화이트 품종이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 품종은 예로부터 다른 지역에서조차 자주 블렌딩에 쓰이던 품종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몇몇 와이너리에서 실험적으로 시도한 양조방법이 성공적이었고 더불어 산으로 둘러 싸여져 있고 한쪽 면이 바다로 싸인 고립된 이 지역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몬테풀치아노는 첫 향의 구수한 향을 제외하고는 주로 부드럽게 이어가다 타닌과 스파이시한 맛, 그리고 적절한 산도가 주된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 특산물인 돼지고기로 만든 매콤한 살시차(일종의 살라미)와 잘 어울립니다. 몬테풀치아노의 특징이라면 특별한 특징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브루쪼의 와인 생산 형태는 공동 생산회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주된 개인 생산자는 30여 개 정도에 달한다고 합니다.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몬테풀치아노 다브르쪼(Montepulciano d'Abruzzo)는 적어도 85%의 몬테풀치아노 품종으로 만들어지며 공인된 다른 레드 품종을 최대 15%까지 블렌딩 할 수 있습니다. 최상급의 와인은 빛나는 루비 레드 색상과 드라이하고 부드러우면서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정확히 알아두어야 할 부분은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라는 이름은 넓게 쓰이는 것이고 흔히 최상급으로 여겨지는 DOCG로 인증을 받은 것은 꼴리 테라마네(Colli Teramane)라는 지역에서 나오는 것만을 한정하는 것입니다. 즉,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 콜리네 테라마네(Montepulciano d'Abruzzo Colline Teramane)가 되겠지요. 2003년에 등급을 획득했고 아브루쪼 생산지 중 30개 지역에 위치한 포도밭에서 몬테풀치아노 품종 90% 이상으로 제조됩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 중 친숙한 것 두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먼저 우마니 론끼라는 와이너리가 내놓은 와인입니다. ‘요리오(Jorio)’라는 와인이 신의 물방울에 소개돼 편의점에서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을 정도고 한번쯤은 보았을 와인입니다.
우마니론끼는 마르케지역의 전통적인 와인(Verdicchio, Rosso Conero)의 대표주자이며, 샤르도네(Chardonnay), 쇼비뇽 블랑(Sauvignon Blanc), 카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등 해외 품종들과 토종 와인과의 접목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마니론끼의 독특하고 인상적인 스타일은 아드리아 해와 언덕 사이에 있는 마르께(Marche) 지방에서 비롯되는데 마르께 지역은 최근 소비자의 기호에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새로운 스타로 부각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코네로(Conero) 지역 안에 있는 콩카강(River Conca) 인근과 폴리아(Foglia), 메토로(Metauro), 세자로(Cesaro)와 트론토(Tronto), 그리고 앙코나(Ancona) 지역의 카스텔리 디 제시(Castelli di Jesi)와 쿠프라몬테(Cupramonte)등이 마르케의 주요 와인 생산지입니다.
긴 일조량과 시원한 밤, 그리고 겨울의 추위를 중화시키는 해풍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마르케 지방에서는 몇 천년간 포도를 재배해왔다. 이러한 마르케의 지역적인 특성은 그 자체로도 우수한 와인 생산지의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우마니론끼 역시 화이트 와인에 이상적인 중간농도의 자갈 토양과, 레드와인에 이상적인 석회질 토양에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혜택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튼 요리오의 인기가 하도 높아 요리오의 서브 와인이 기획돼 판매되고 있을 정도로 국내에서는 인기를 끌고 있는 와인입니다.
www.umanironchi.
"트럭채로 사야 할 와인이다." 그리고 "모든 레스토랑에서 하우스 와인 사용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며 로버트 파커의 극찬을 받아 유명해진 파네세 그룹의 와인도 몬테풀치아노를 쉽게 맛볼 수 있는 상표입니다.
파네세가(家)는 1582년 파네세 왕자와 결혼한 오스트리아 여왕 마르게리타(Margherita)가 아브루쪼 지역에 위치한 오르토나(Ortona)와 파르네토(Farneto)의 풍경과 기후에 매료되어 와인 생산을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합니다. 본 고장인 아브루쪼를 중심으로 남부 이탈리아 와인의 핵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뿔리아, 캄파니아, 바실리카타, 시칠리아에 그들의 숨결이 녹아 있는 보석 같은 와이너리들을 소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2012년 파네세 그룹의 설립자 까밀로가 세상을 떠나고 세계적인 패션 그룹 베네통과 파트너십을 통해 좀 더 세련된 스타일의 와인 레이블 판티니(FANTINI)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판티니 브랜드는 파네세 그룹의 포도원 관리, 와인 양조 및 비즈니스에 대한 자신감의 결정체로 이태리 프로 사이클링 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파네세 몬떼뿔치아노 다브루쪼(Farnese Montepulciano d'Abruzzo)는 2005년 이탈리아 비니탈리(Vinitaly)에서 금메달, 2006년 영국 International Wine Challenge(IWC) 금메달, 2010년 Decanter지 은메달 등의 수상경력이 있습니다. 타닌과 산미, 당도의 밸런스가 매우 좋으며, 가격대비 맛과 향이 매우 뛰어난 와인입니다.
이 와이너리에서는 <신의 물방울> 19권에 등장해 ‘이탈리아의 몽페라’라는 별칭을 얻은 와인 까살레 베끼오 몬떼뿔치아노 다브루쪼(Casale Vecchio Montepulciano d'Abruzzo)도 생산되고 DOCG급으로 코리아와인챌린지 2012에서 골드 메달 수상한 파네세 콜리네 테라마네(Farnese Colline Teramane)도 판매되니 지갑이 두둑한 경우에는 맛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아브루쪼에는 해발 2100미터에 위치한 ‘Campo Imperatore’라는 호텔이 있습니다.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2차 세계대전 말미 실각해 감금되어 있던 곳입니다. 히틀러가 특공대를 보내 구출하기까지 갇혀 지낸 사연이 있는 곳인데 그러고 보면 이 몬테풀치아노의 고장은 영화 속 배경과도 많은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포르코 로쏘-로쏘(Rosso)는 이탈리아어로 붉다는 뜻은 동시에 레드와인을 지칭하는 말, 와인에 걸맞는 주인공 이름인 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삶을 삽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살상을 저지르는 삶, 열광과 흥분에 경도돼 이쪽 아니면 저쪽을 강요하는 세상에 선을 그어버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몬테풀치아노 품종이 가진 특성 같다고나 할까요. 날카롭지 않고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은 포르코 와인으로 적합해 보입니다.
영화 속 비행기 설계를 담당하는 소녀 피오가 묻죠. 파일럿이 되는 최고의 조건이 경험이냐고. 포르코는 고개를 가로 젓습니다. 그리고 “영감(Inspiration)”이라고 대답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주장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영감, 아닐까요?
태풍이 지나간 더운 여름밤. 붉은 돼지를 보면서 몬테풀치아노 한 잔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