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벚꽃에이드 편
이곳엔 아직 벚꽃이 날려요. 남쪽은 이제 꽃은 가고 잎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된 기분이네요. 장소가 달라지면 시간을 거스를 수도 있나 봐요. 시간은 시계 속에만 넣어둘 게 아니라 눈앞에서 직접 느껴야 한다는 걸 다시 깨달았어요. 올해는 이렇게 오래 꽃을 볼 수 있어 참 좋아요. 그래도 봄은 여기까지 만이겠죠?
벚꽃을 볼 때면 자주 스르르 녹아버릴 솜사탕의 색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어깨를 흔들 때마다 살짝 설탕 향기가 새어나오는 것 같다. 관광지에서 산다는 그녀의 옷차림마저 달달한 솜사탕 같다.
오늘은 새로 나올 책의 원고를 끝내서 출판사에 들렀어요. 요 앞 초등학교 앞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건물 2층에 있는데. 네, 파란색 간판 맞아요. 메일만 주고받으면 되지만 핑계 삼아 가끔 이렇게 나들이도 하고 싶거든요. 오랜만에 고속열차도 타보고 말이죠. 봄에는 사람들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풍경이 되어 보는 것도 좋거든요. 그냥 구경만 하며 사는 건 재미없잖아요.
학교 다닐 적 친구들이 이곳에 아직 좀 남아있어요. 사실 출판사 편집자가 선배 언니이기도 하고요. 반가운 얼굴은 익숙한 얼굴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었죠. 사장님도 그래서 반가운 얼굴이에요.
관광지야 사람은 늘 넘쳐나지만 매일 낯선 얼굴들이죠. 그곳에선 무엇인가 찾으러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사람들의 발뒤꿈치만 쳐다보죠. 그래서 이렇게 낯선 곳을 헤매는 반대의 일도 해보고 싶거든요. 예전 이곳에서 원고 미팅을 했었는데, 아마 기억을 못하실 거예요.
호호, 작가는 아니에요. 아주 가끔씩 번역 일을 해요. 이번엔 삼백 페이지짜리 소설을 하나 끝냈어요. 누구는 그러더군요. 세상의 모든 번역은 오역이라고. 하긴 바로 앞에서 듣는 사람의 말도 오해하는데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곳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확하게 누가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읽어보려는 출발점이니까, 왜곡하지만 않는다면 좋은 일이라 생각해요. 저처럼 사람들과 대화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죠. 어쩌면 사랑을 하는 일도, 우정을 나누는 일도 서로의 마음을 잘못 읽어가는 과정 아닐까요. 사람들이 모두 자신 앞에 있는 이의 마음을 정확하게 판독해 버린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행복한 웃음을 짓지는 못하겠죠. 지금까지 세 권 정도 제가 번역한 글이 책이 되어 나왔어요. 세 번의 사랑과 세 번의 오해를 한셈이겠네요.
대화를 나누는 게 멋쩍다면서 그녀는 마라톤 선수의 두 다리처럼 일정한 보폭으로 빠르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발음에는 군데군데 긴장도 묻어 있다. 습관은 생활이 남긴 굳은살이다.
직업이요? 그러게요. 뭘까요. 학생들을 가르치니 선생님이기도 하고, 가게를 열고 있으니 자영업자이기도 하네요. 가끔씩 글도 쓰고 있으니 프리랜서인가? 헤헤 헷갈리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누군가의 생각을, 지식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는 일이 좋아요 저는. 그래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하는 일을 택하려 했는지도 모르죠. 남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되짚는 과정은 느리지만 섬세한 일이죠. 하지만 현실이 꼭 영화처럼 곱지만은 않아요. 아이들은 교수님이라 불러주지만 몇 학점 되지 않는 시간강사예요. 음, 아니네요. 이번 봄에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됐어요. 그냥 비정규직 노동자가 맞겠어요. 이 봄에는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들이 많아졌을 거예요. 얼마 되지 않는 시간마저 배당받지 못했으니까요.
대학마다 학생들이 수강신청 때문에 난리라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맞아요. 누구 인터넷 환경이 좋은가로 수강이 결정되는 시절에 요즘 학생들은 산대요. 이해가 안 되신다고요? 관심 없으시겠지만 강사법 개정으로 대학들이 전임교원의 강의 담당비율을 높이게 되었거든요. 네, 좋은 일이죠. 그런데 비용이 부담된다며 시간강사의 담당 교과목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일이 발생하더군요. 과목은 줄고, 한 강의에 왕창 학생들이 몰리니 서버에 접속한 순서로 결정되는 거죠. 제때 수강신청에 실패하면 기초 과목을 듣지 못한 채 고학년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대요. 강사들 처우 개선하자고 만든 법을 이렇게 피해가다니.
분명 누군가는 오역, 아니면 오독을 하고 있는 거겠죠. 그래서 올봄에는 직업이 하나 줄었네요.
문 앞에 달아 놓은 풍경風磬이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바람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연락이다. 풍경은 그 신호에 귀기울이다 자신의 몸을 부딪쳐 알려준다. 예보된 비가 밤사이 내리면 벚꽃은 젖은 꽃길을 만들어 둘 것 같다.
자영업이라고 하니 쑥스럽긴 하지만 작은 서점 겸 작업실을 운영해요. 돈이 안 된다는 서점을 왜 하려고 했는지. 글쎄요, 세상에 반항하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가게는 생각보다 아주 작아요. 월세도 저렴하죠.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르지만 한동안은 지켜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조금 걱정되기도 해요. 무슨 ‘~리단 열풍’이 그곳에도 불고 있거든요. 그렇게 되면 임대료가 엄청나게 뛰게 될 텐데. 한쪽 귀퉁이에 있으니 그래도 괜찮겠죠?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사는 곳은 관광지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에 익숙해요. 타지 사람들이 늘 넘쳐나고,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 북적이죠. 자고나면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곳에 뭔 서점이냐고, 여행객을 빼면 인구도 적은 곳에서 무슨 서점을 하냐고 주위에서 많이 말렸어요. 너도 유행 따라하다가 망한다며. 아, 강사직을 얻지 못해 차린 건 아니에요. 이미 그 전에 계획한 거죠. 먹고 살길이 없어서 차렸다면 오판한 거라고 해야겠죠. 물론 서점 운영도 만만치 않아요. 저처럼 작은 서점은 책을 저렴하게 가져오기도 어렵고, 이윤을 남기기도 힘들거든요.
어떤 책들을 파느냐고요? 글쎄요. 관광지에서 사 갈만한 책이라고 남들도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과연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 서점에서는 그림책과 여행책만 팔아요. 여행지에서 여행책을 판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여행은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한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내가 돌아가서 무엇인가 해야 할 것들을 찾는 시간이 여행인 거죠. 찾지 못할 때까지 여행을 할 수도 있어요. 아마 대부분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가야할 곳을 소개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사는 관광지에 대한 책을 팔지는 않아요. 음, 그림책은 글이 많지 않아, 사람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들여놓았어요. 왜 아이들은 글을 모르지만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지어내가며 책을 읽잖아요. 제 조카도 그러는 걸 봤어요.
누군가가 써놓은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은 때가 있죠. 책이 보여주는 그 장면에 내 이야기가 덧씌워지는 순간을 경험해 본적 없으세요? 사람들은 나이 먹고 늙어갈수록 그림책을 찾을 거라고 생각해요. 책이 나를 설득하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책을 설득하는 시간이 온다고, 저는 믿어요. 그림책은 그렇게 마음을 전하는 좋은 도구죠. 어느 대상의 마음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전달해주는 것, 그래서 그림책이 좋은가 봐요. 풍경은 이 자리에 그대로 서있지만, 여행 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서로 다른 풍경을 담아가게 되죠. 자신의 그림책을 한 권씩 써나가는 거죠.
아, 그런데 이 커피는 참 맛있네요. 원두를 직접 볶으시나요, 아니면 어디서 가져오시나요? 제가 너무 많은 걸 물어보는 건가요? 서점에서 커피를 판매하다보니 조금 궁금해요. 좋은 커피를 마시고 싶거든요.
가끔이지만 번역일도 한다고 말씀드렸죠? 아침 일찍 일어나 글을 쓰고 오후에는 손님들을 맞아요. 지나는 관광객들이 창으로 보이고 매일 같아 보이는 다른 하루가 스쳐가요. 그리고 저는 책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읽죠. 커다란 종이사전을 놓아두고 일을 하냐구요? 누가 요즘 그렇게 일을 하겠어요. 노트북 모니터에 포털사이트 사전을 띄워두죠. 시간이 넉넉한 사람이 아니라면 효율성에서 따라올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온라인 사전 말고도 여러 번역기 사이트도 참조를 하죠. 모두 일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한 방법이죠. 난관에 부딪히면 번역커뮤니티 사이트에 도움을 구하기도 하죠. 직역도 의역도 필요할 때, 들어가야 할 때를 잘 아는 사람이 능력 있는 번역자겠죠.
전문지식에 해박해야 풀 수 있는 일에는 나서지 말아야죠. 제가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것에만 손대려고 해요. 누구의 생각을 전달하는 일에는 참 손이 많이 가요. 그렇게 단어들과 씨름하다보면 석양이 물들죠. 서점 앞 석양이 참 좋아요. 높은 건물이 없으니까요.
누군가를 설득한다기보다는 전달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지금 제가 하는 세 가지 일이 다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어요. 아이들을 다시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책은 곁에 있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도 있을 테니까. 질문 하나해도 될까요? 나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꽃일까요, 아니면 열매일까요? 열매가 맺히려면 꽃이 피어야하죠. 사람들의 세상에는 꽃 없이 열리는 열매도 많지만, 그건 사람에게 득이 되는 열매는 아닐 테니까.
나무는 꽃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 같아요. 나무의 마음도 읽을 수 있다면, 저는 꽃이 번역자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짧은 날들 동안 자신의 생애를 말하려면 얼마나 가슴을 누르고 눌러 꽃을 피우겠어요. 번역하려는 이의 마음도, 그 속에서 읽어내려는 사람의 마음도 그래서 중요하겠죠.
서점 앞길에는 벚꽃이 피어요. 벚꽃이 지고나면 나지막한 소아과 의원의 뒷마당에 라일락이 피겠죠. 중학교 담장으로 아카시아 꽃과 뒷산 가는 길 배나무 밭에 배꽃까지 피면 이제 여름인줄 알게 되겠죠. 한철 내내 나무의 마음을 번역하다보면 제가 나무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러고 보니 이 카페도 여행지 같은 곳이네요. 사람들이 늘 일렁이며 들어왔다 어느 사이엔가 빠져나가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사람,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모두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싶은 사람들이겠죠?
딸랑.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두 사람의 손이 함께 흔들린다. 바람이 세졌지만 공기는 더 따뜻해졌다. 아쉬운 봄밤이 간다.
벚꽃 절임 60g, 설탕 250g, 꿀 50g, 소금 1스푼, 레몬즙 10ml, 탄산수
봄날을 대표하는 벚꽃은 그 향기와 흩날리는 풍경이 청춘의 아쉬움을 가득 담고 있다. 지고 마는 꽃을 마신다는 것은 아름다운 기억과 두고두고 함께 한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벚꽃청은 해독작용과 항산화 작용이 있어 피부 미용에 좋다고 한다. 벚꽃 절임은 해외 직구로 판매되기 때문에 구입이 힘들 경우 벚꽃 개화기에 직접 절임을 만들어 사용해도 된다.
1. 소금에 절인 벚꽃을 물에 불려 소금기를 제거한다.
2. 하루 동안 물에 불렸던 벚꽃을 흐르는 물에 행궈 냄비에 넣는다.
3. 냄비에 설탕과 꿀, 소금, 벚꽃 절임, 물 300ml를 넣고 끓인다.
4. 끓어오르면 약불로 10분간 조심히 졸인다.(타지 않게 유의한다)
5. 레몬즙을 넣고 다시 2분간 졸여 벚꽃청을 완성한다.
6. 잔에 얼음을 채우고, 벚꽃청 30ml와 탄산수 300ml를 넣어 완성한다.
(벚꽃청을 만들기 어려우면 판매되는 벚꽃청을 이용해도 된다)
*벚꽃 절임 만들기 : 벚꽃잎을 식초물에 살살 씻어 소금물에 3~4시간 담궈둔다. 큰 접시 위에 건져 다시 소금을 골고루 뿌린다. 어느 정도 절여진 상태를 확인한 후 한 개씩 떼어내어 말린다. 한 두시간 지난 후 소독한 병에 소금을 뿌려가며 넣고 밀봉한다.
최근 출간한 <쓸쓸한, 그래도 따스한>에 나오는 스무 편의 이야기 가운데 몇 편을 브런치에 나누어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