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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Sep 03. 2019

마법의 연필을 깎는 남자

_갤럭시 레몬에이드 편

창을 통해 들어온 역광이 사물들의 윤곽에 금빛 테두리를 씌운다. 때로는 뚜렷한 원색보다 침묵하는 검정이 멋져 보일 때가 있다.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추억이 그런 것처럼.

새로 들여놓은 작은 칠판이 며칠째 빈칸으로 남아 있다. 흰 백묵으로 무언가 쓰든지, 그리든지 해야 할 텐데 하며 며칠을 서성대는데, 빛바랜 금테 안경에 오후 햇살을 반사시키며 남자가 정적을 깬다.    


오늘은 소속회원들이 모두 쉬는 날이야. 덕분에 우리 사무실도 문을 닫았지.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는군. 요즘 이 동네는 거래가 워낙 뜸해. 집을 사고파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지. 뭐 그래도 이곳은 아파트를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았잖아. 전세를 구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있어서 계약은 그래도 좀 되는 편이야. 그리고 워낙 전세가도 비싸잖아. 몇 개 성사시키지 않아도 월세 내고, 생활비 가져가는 데는 크게 문제없어. 애들 다 키워놓았고 집사람이랑 둘만 살면 되니까 크게 욕심도 없어.    


실은 연필을 좀 사러 갔다 오는 길이야. 우습게 생각하겠지만 내겐 연필이 부적 같은 것이라서.

연필을 어디 쓰냐고? 하긴 옛날에는 부동산 계약서도 모두 수기로 작성했지만, 요즘에야 컴퓨터에서 양식에 맞춰 입력하고 프린터로 출력하니 그럴 이유도 없지. 말하기 좀 부끄럽긴 한데, 손님이 없고 혼자 있을 땐 글을 써. 음. 사실 동화를 써. 아 뭐 그렇다고 어디 투고해서 상을 탄다거나 책을 낼 생각은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실력도 없고. 그런데 내 마음이 그냥 이야기를 적게 해.    


글은 고등학교 때부터 써왔어. 그땐 꽤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 백일장은 물론이고 전국 공모전에서도 꽤 많이 상도 탔어. 옛날에는 문학동인회라는 게 있었는데 나도 한때 회원이었지. 지금처럼 남녀공학이 대부분인 것도 아니고, 남녀 학생들이 만나서 돌아다니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어. 그래서 그런 아쉬운 부분을 채워주기도 했거든. 시화전이라도 하면 내게 꽃을 달아주는 여학생들도 많았지. 요즘에도 그런 걸 하나 모르겠네.    


처음엔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어. 국문과 진학을 준비했지만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글을 쓰고자 하는 꿈은 접었어. 취직이 잘된다는 상대에 입학했지. 그깟 소설 안 쓰고 만다고. 그렇게 잊은 줄 알았어. 그래도 복학을 하고 나서는 슬그머니 원고지를 만지작거리게 되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젊은 사장. 그거 알아? 사람에게 재능이라는 건 한 때라고. 왜 축구선수들도 어릴 때 천재니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라는 소리를 하며 난리를 치잖아. 그런데 그 친구들이 끝까지 잘 나가는 경우가 많이 없잖아. 재능은 왔을 때 열심히 갈고 닦고 물을 주어야 해. 언제나 피어 있는 꽃이 아니거든. 기껏 몇 년이라고.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재능이 언제까지나 갈 줄 알아. 나중에 쓰려고 꺼내면 이미 녹이 슬어 사용하기 힘들게 된다고. 그걸 몰랐던 거지. 대학을 졸업할 때쯤 작품을 공모에 보내봤지만 모두 다 고배를 마시고 말았어. 그 길로 그만두었지.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회사에 취직을 하고는 정신없이 살았어.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때가 있다. 흘려보냈다고 생각한 단어들을 문득 문득 주머니에서 꺼내게 되는 순간이 있다. 꾹꾹 연필로 눌러 쓰고 지우개로 말끔히 지웠지만 남아 있는 흔적처럼 아쉬운 것들이 있다. 다시 연필을 쥐게 되는 일은 그런 아쉬움 탓일까?    


돈을 버니까 좋더군. 궁핍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하루하루를 만끽하고 살았지. 굳이 글을 쓰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데, 소설은 아주 딴 나라 이야기였어. 그렇게 아들, 딸 낳고 잘 지내며 세월은 흘렀는데, 직장생활에 조금씩 회의가 오는 거야.

과장자리가 지나고 나서부터는 살벌해지더라고. 동기들 사이에서도 서로 올라가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제일 힘들었던 건 줄을 잡아야 한다는 거지. 어느 곳이든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많거든. 자본주의 사회는 필요로 하는 사람을 추려내는 시스템을 가동해야만 그들이 말하는 대로 효율적으로 돌아가게 마련이기도 하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보다는 충실히 이행해줄 사람을 원하지. 개인의 개성 같은 것을 존중하는 회사가 얼마나 되겠어. 그러니 예전 정 많던 사람도 점점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하더군. 옛날에는 업무성과를 칭찬하던 상사가 자신의 취향대로 따라오지 않으면 화를 내기 시작하는 거야.  

  

싫은 내색을 했지. 그땐 실력만 있으면 문제없다고 믿었으니까. 헛된 믿음이었어. 그 뒤로는 차가운 배제가 따라오는 거였어. 숙이며 속물처럼 살아가든가, 다른 길을 가든가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었어. 거기서 또 한 번 실수를 한 거야.

뭐 그게 실수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 후회는 하지 않지만 다시 그 순간이 온다면 고민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아. 나는 내가 무엇이라도 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거든. 늘 계획을 세우고 대책을 마련하며 훗날을 내다보는 능력도 있고, 일처리도 뛰어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그 재주라는 거. 제 주변에 갖춰진 환경 속에서라야 빛나는 것이더라고. 그걸 뛰어넘을 만할 능력까지는 안 되었던 거야.    


실패를 많이 했어. 회사를 만들어 운영해보기도 했고 다른 곳에 스카우트되어 일을 해보기도 했어. 녹록지는 않았어.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능력은 그 자리에서만 발휘되었던 것이었고, 계속 능력이 이어지지도 않았어. 계속 실패를 거듭하다 공인중개사 시험이라도 보자고 해서 시작한 끝에 지금 가게까지 하고 있는 거야.    


사무실을 처음 시작하던 날,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가지고 다니던 가방에서 오래된 연필이 한 자루 나왔어. 사무실에서도 항상 일을 할 때 이면지에 연필로 끄적이던 버릇이 있었거든. 외근 나갔다 혼자 있을 때도 담배 껍데기에 뭐라도 끄적였지. 아주 오래 잊고 살았었어.

나는 끊임없이 내 마음을 기록하고 싶었나봐. 그때 깨달았지. 글은 잘난 맛에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면을 찾아가는 도구 같은 것이었다는 걸. 아름다운 생각도, 분노의 생각도 모두 나를 지탱시키는 것들이거든. 그걸 캐내는 재주를 신이 내게 주었단 것인데, 바보같이 그게 나를 그저 빛나게 해주는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거였어.    


그날 이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어. 연필로 말이야. 대신 소설 말고 동화를 쓰기 시작했지.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쓰면 마음이 편안했거든. 대단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어. 남들보다 잘 쓰겠다는 것도 의미가 없고. 그냥 나를 생각하는 일이지. 연필은 그 시간을 누리는 기쁨이고. 한데 그날부터 연필을 모으는 취미가 생겼어. 잘 모를 거야. 연필심이 종이를 문지르며 지나가는 촉감에서 느껴지는 행복을.    


직장 다닐 때 첫 외근을 나갔다가 들른 문방구가 있었는데, 미술용품 같은 것들을 많이 파는 곳이었어. 자취방이 있던 전철역 근처였는데 그곳 사장님이 연필을 사러왔다고 하니 한참을 쳐다보더군. 지금처럼 8월이었어. 와이셔츠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고 해는 길어서 저녁시간이 지났지만 밖은 환했지. 어려 보이는 청년이 후줄근한 차림으로 화방에 들어오니 좀 안타까웠나봐.

마법의 연필 한 자루 줄까 그러더군.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데 굉장히 고풍스럽게 생긴 연필 한 다스를 주는 거야. 그냥 봐도 가격이 좀 있어 보이더라고. 그림을 그릴 게 아니라서 제일 싼 걸로 달라고 했더니 사장님이 일반 연필 가격으로 가져가라고 하더군. 그때는 그러마하고 받아 왔지.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어서 가격 비교 뭐 이런 것도 못했으니 그냥 좀 좋은 것을 주셨나 했지.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그 연필을 못 찾겠더라고. 회사 다니는 동안 몇 번 그 가게에 가서 사장님께 연필을 샀어. 근데 그다음부터는 몇 자루씩만 주시는 거야. 수급이 잘 안 된다며 웃으시더라고. 어쨌든 회사일 하는 짬짬이 메모를 할 때면 그 연필로 글을 썼어. 느낌이 좋아서 그랬는지 일도 잘되는 것 같았어. 소설가가 되지는 않았지만 힘들었던 초년병 시절을 견디고 승진도 할 수 있었지.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지만 말이야.    


그 연필이 지금은 수입되는 연필이 아니라는 것은 다시 연필을 사야겠다고 생각해서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 이제는 생산되지 않아서 기존 제품만 알음알음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고 하더라고. 마침 물건이 나와서 한 번 욕심을 내 거래하러 가보았는데 사지 않고 돌아왔어.

아, 돈은 있었어. 그런데 사장님이 말씀하셨던 마법의 연필은 꼭 그 연필이 아니었어도 되었을 거야. 소중하게 여기고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게 나에게 마법을 일으켜 주었다는 거지. 모르겠어. 여전히 그 가게가 있고 사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연필을 사왔을지도. 하지만 사장님은 이제 주려고 하지 않으셨을지도 몰라. 마법은 늘 내 곁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것 같아.    


나무향이 그윽했지. 칼로 하나하나 깎아나가다 보면 향이 온 방안에 퍼졌어. 흑연은 부드러웠고 종이를 따라 내려가던 촉감이 참 좋았어.

열정은 무언가를 이루려는 욕망이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하며 지탱하는 힘 같은 게 아닐까. 연필심을 깎으며 오늘 하루를 견뎌내는 것 말이야. 그게 내게는 열정이고 마법이었던 것 같아. 지금까지 쓴 동화가 한 열 편정도 되는 것 같아. 이년 전에 태어난 손녀가 한글을 깨우칠 때쯤이면 책으로 만들어주려고. 잠들 때 읽어주면 더 좋겠지?    


내 것 사는 김에 그냥 향기 좋은 연필을 조금 사왔어. 늘 맛있게 가끔 공짜 커피도 건네주는 젊은 사장 하나 주려고 말이야. 이걸로 메모하다 보면 마법은 아니라도, 잠깐 쉬어가는 순간 정도는 가질 수 있지 않겠어? 작은 생각이라도 한 번 끄적여보라고. 그럼 나는 이만 창가로 가서 연필을 깎아야겠어. 남은 오후 내내 연필 향만 맡고 싶어. 오늘은 그냥 나를 위해서만 말이야.    


밀쳐둔 칠판에 하얀 백묵으로 마법의 연필을 그렸다. 누구나 가방 속에 이런 연필 한 자루쯤 넣어두고 살아가기를. 때가 되면 지워버려도 그 향기가 남아있을 연필을 그리며 그를 본다. 역광에 그의 안경과 작은 칼과 연필 몇 자루가 동화 속 풍경 같다.    




갤럭시 레몬 에이드

버터플라이티 10g, 뜨거운 물 600ml, 레몬 2개, 얼음, 사이다    



마법은 놀라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고 한다. 원래는 품고 있어도 보여주지 않다가, 때가 되면 나타나 감동을 주는 작은 마법이 우리에게도 한 가지씩 숨어있지 않을까. 색깔이 변하는 버터플라이티는 기억력 증진에도 좋은 재료다.    


1. 뜨거운 물 600ml에 버터플라이티를 우려내며 끓인다.

2. 파란색 물이 많이 우러나면 불 끄고 식힌 후 얼음틀에 부어 얼린다.

3. 얼린 파란색 얼음을 거칠게 갈아준다.(거칠게 큰 덩어리로 갈아줘야 보

라빛이 살짝살짝 보여 더 화려하다)

4. 레몬 2개 중 슬라이스 한 조각을 만들고 나머지는 착즙한다.

5. 착즙한 레몬 즙 90ml를 잔에 부어준다.

6. 얼음을 잔에 절반 정도 차게 넣어준다.

7. 파란색의 티 얼음 간 것을 잔에 넣어준다.

8. 잔의 나머지 부분에 꽉 차게 사이다를 넣어준다.

9. 살살 저어주면 색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 출간한 <쓸쓸한, 그래도 따스한>에 나오는 스무 편의 이야기 가운데 몇 편을 브런치에 나누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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