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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Aug 30. 2019

가사 없이 부르는 노래

_고구마 수정과 셔벗 편

장마인가요. 하긴. 요즘은 장마라 부르기도 뭣하네요. 집중호우가 많으니까. 아무 때나 며칠씩 쏟아지니까. 보칼리제(Vocalise)를 들을 수 있을까요? 원래는 발성연습을 위해 만든 거라는 가사 없이 부르는 성악곡 말이에요. 사람 목소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악기마다 한 개씩은 다 연주한 곡이 있더군요.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어요. 그 사람은 게시판으로 만든 허술한 홈페이지를 운영했죠. 시를 쓰는 남자였어요. 매일 글 한 편과 음악 한 곡씩을 올려 두었죠. 좋은 음악들이 많았어요. 밤이면 검은색이 가득한 그곳에 들어가 한 곡씩 들었어요. 다락에 숨겨두고 하나씩 빼먹는 곶감처럼 달콤했어요. 피곤하면 털어 넣는 알약 같았죠.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흘러나오던 곡이 이거예요. 음, 이건 트럼펫 같은데 처음 듣는 연주네요. 트럼펫 소리는 세상을 많이 살아낸 사람이 들려주는 후일담 같아 좀 슬퍼요. 차분하지만 더 쓸쓸하죠. 오늘 같은 날에 딱 어울리긴 하지만.    


그녀가 가사 없는 곡을 요청하는 것은 지쳤다는 표현이다. 조용하고 박자가 빠르지 않은 곡을 주로 부탁하지만, 쓸쓸한 얼굴을한 날에는 늘 사람이 노래하지 않는 곡을 원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일을 한다. 스스로 대필 작가라고 부르기도 하고 대리 작가라고도 했다. 자주 자서전을 쓰는 일을 한다는 그녀는 오늘 누구의 목소리에 지친 것일까.    


오늘은 한 사업가의 일생을 만들어주고 왔어요. 제 손을 떠났으니 이제 그 책의 저자는 그 사람이 되었어요. 누가 쓰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사람들은 어차피 이야기의 주인공에만 관심이 있는데요 뭘. 고객들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만들 것과 격하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꾸며줄 것, 이 두 가지를 제게 원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어느 것부터 어디까지 들려주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죠. 말주변이 없어서 묵묵히 삶만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 있는가하면, 욕망과 돈은 많은데 들려줄 게 없는 사람들도 있어요.    


유명작가는 물론 드러내놓고 일을 하지는 않지만,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서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한 작품에 몇 천만 원씩 받기도 한다더군요. 전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 달치 직장인의 월급 정도는 받고 일해요. 일감도 끊기지 않고 들어오는 편이구요.    


이런 일감 얼마나 될까 싶겠지만 수요는 생각보다 많더군요. ‘녹색창’ 이런 데를 한 번 두드려보세요. 대필 작업을 해주는 곳이 넘쳐나요. 가격도 천차만별이죠. 책으로 내주고 보급까지 해주는데 돈이 그리 들지 않는 곳들도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다양한 줄 몰랐어요. 풋내기부터 은퇴한 관련 업종 종사자들까지. 그만큼 찾는 곳이 있다는 뜻 아니겠어요? 경력이 없으면 에이전시에 수수료만 왕창 떼어주고 고생만 하는 경우도 많아요. 전 제대로 이야기를 만들고,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어요.    



예전엔 시를 썼어요. 시가 뭔지 알지도 못하던 시절부터 썼어요. 동아리 선배였던 그가 준 시집 한 권을 읽고 난 후였죠. 무작정 쓰고 싶은데 처음에는 쓸 말이 없지 뭐예요. 오래도록 혼자였어요. 세상 모든 게 지루했죠. 그래서 공책 위에 아무 단어나 써놓고 그 단어에 대해 써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기록하다보니 한 페이지가 훌쩍 넘어 가더군요. 그 다음엔 그렇게 부풀어 오른 문장들을 다시 줄여가기 시작했어요. 한 문장만 남을 때까지 줄이고 또 줄여갔어요. 그렇게 남은 한 문장이 전 시詩라고 생각했어요. 혼자 있을 때면 그걸 매일 놀이처럼 하고 지냈어요. 그러다보니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생기더군요. 그러면서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쓸 수 있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쓰는지 잘 몰라요. 어딘가에서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제겐 그랬어요. 끝까지 말해보고, 지울 수 없는 말이 되는 것을 모은 것이 시가 되었어요. 그러다 비록 지방 신문이긴 하지만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했어요.    


고백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끝내 하지 못했죠. 마음 먹고 만나기로 한 그날, 전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어요. 그는 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말도 없이 서울로 떠났다는 걸 전날에 이미 알았어요. 왜 가버렸냐고요? 저도 몰라요. 물어보지 않았어요. 만날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어요. 제겐 모든 게 너무 불리했으니까요. 그날부터 시를 쓰지 않기로 했어요.    


제게 필요한 건 노트북과 녹음기가 전부예요. 물론 가장 필요한 준비물은 인내심이죠. 물건 파는 가게에만 진상 고객들이 많은 건 아니거든요. 처음 만나면 우선 편안하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요. 이야기하는 자세나 말하는 모양을 보며 어떤 인생을 사는 사람인가 파악하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이렇게 잘났다. 이렇게 대단하다 말이죠. 하고싶은 말만으로는 이야기가 다 채워지기 힘들잖아요.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조금씩 끌어내야 한다구요. 그러면서 인물의 특징을 잡죠.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보이게 할까를 캐릭터로 설정하는 거죠.    


자주 만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쓸 수 있는 내용과 다양한 캐릭터 창조가 가능하지만, 고객의 시간에 맞춰 인터뷰를 하다보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어요. 대부분 시간 내기를 싫어하죠. 보충할 자료만 마구 챙겨주는 경우도 있어요. 그 무뚝뚝한 활자들 속에서 자신을 찾아보라고 유혹하죠. 자잘한 에피소드까지 이야기해주는 고객을 만나면 정말 행운이죠.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러더군요. 자기는 삼십 분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다보면 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전 그게 안돼요. 늘 그 사람의 한 걸음 옆에서 머

물죠.    


인터뷰 일정 중간 중간에 고객이 하는 일에 대한 공부도 시작해야 해요. 전혀 문외한인 경우에는 시간이 한참 걸려요. 관련 내용들도 들춰봐야 하고 신문 스크랩도 챙겨야 하고, 구글링은 필수죠. 사람들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 데이터도 적절히 첨가해야하고요. 인터뷰한 내용을 녹취해 풀어내는 일은 고역중에 하나죠. 빠짐없이 활자화시켜야 해요.    


녹음된 목소리를 다시 듣다 보면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그 사람의 표정이 느껴지기도 해요. 말하는 속도, 쉬는 간격, 목소리의 높낮이, 습관처럼 내뱉는 허사들에서 그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죠. 우린 때때로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 스스로를 쏟아내고 다닌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요.    



집중해야 하는 노랫말보다 단순하게 내뱉는 스캣으로만 부르는 노래가 더 뭉클할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연이 누구에게나 서늘한 감동을 주는 건 아니다. 무의미한 음절로 가사를 대신해 흥얼거리는 스캣이, 가사 내용보다 몸이 내뱉는 일정한 소리가 때로는 더 절절한 법이다. 다음 트랙을 기다리듯 흐르는 침묵 사이로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스캣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살면서 한 번쯤 그를 만나겠지 하는, 노래가사 같은 상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잡지사에 취직을 하면서 저도 서울로 올라왔죠. 그래서 한동안 지하철을 탈 때면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죠. 그러나 그런 일은 드라마나 자서전에나 나오는 얘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한동안 한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어요. 그냥 맨발에 검정구두가 예뻐서죠. 사실은 콜록거리며 양말도 신지 않는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먹었지만, 바짓단 아래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하는 빠알간 복숭아뼈가 예쁘다는 그 사람 말을 아직 믿고 있었던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제는 운동화만 신고 다녀요.    


자료 수집과 녹취가 끝나면 본격적인 인물 창조 작업에 들어가요. 잡지사 기자를 오래 하면서 사람 만나는 일에는 이골이 났죠. 적당히 웃는 얼굴도 지을 줄 알게 됐어요. 어떤 흐름으로 이야기를 끌어내야 할지, 이런 질문에서 어떤 과거를 이끌어내야 하는지, 독자들이 원하는 스토리는 대략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경험이 가르쳐 주더군요. 어떤 부분을 부각시키고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인지는 순전히 제 몫이에요.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또 다른 자아가 되려고 노력해요.     


다중 인격이요? 음, 그럴지도 몰라요. 적어도 그 시간동안은. 연기자가 주인공을 재창조하듯 저도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가죠. 가끔은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가다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는 건 아닐까 깜짝 놀라기도 해요. 아닌 척 해도 누구나 한두 가지 설명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 일을 하면서 많이 배워요. 고객들은 장황한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느냐에서 감탄하죠.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부 꺼내주었다는 고객의 말은 왜 칭찬으로 들리다가 점점 슬프게 들리는 걸까요. 욕망에 편승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는 증거겠죠?    


원고가 넘어가고 나면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되죠. 남남. 혹시라도 그것에 대해 언급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팔려나간다 해도 아무상관없는 일이죠. 가끔 그런 일이 있기도 해요. 누구의 책인지, 누구의 인생인지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그 일을 내가 했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알지만 모르고, 나인데 내가 아닌, 그런 거죠.    


개펄에서 자라는 나문재를 아세요? 바닷가 모래땅에서 살아가는 한해살이 풀이죠. 가을에는 밑 부분부터 붉은 색으로 변하는데 일몰 때 보면 참 아름답죠. 염분에 강하고 생명력이 질긴 식물이죠. 바닷가에 나문재가 번지고 있다는 건 물살에 변화가 생겨 뻘이 생기는 증거라고 하더군요. 바다와 뭍의 모호한 경계에 사는 생명이죠.     


언젠가 썰물이 된 바닷가 숙소에서 풀을 보면서 이곳저곳에 다 어울리지 못하는 나는 어느 경계에 서 있는 걸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불을 끄고 누웠는데 옆방의 노래 소리보다 더 크게 바닷물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밀물은 소리가 없을 텐데 제 마음 속에만 파도치듯 물이 들어왔나 봐요. 나문재는 맛도 별로 없고 영양가도 아주 적은 풀이라, 옛날에는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흉년이 계속되면 사람들이 뜯어서 허기를 채우곤 했대요. 그 사람에게도, 고객들에게도 저는 나문재가 아닐까요? 노랫말 없이 부르는 그 곡처럼 말이죠.    


오늘 새벽에는 작업을 시작하려다가 그 홈페이지에 한 번 들어가 봤어요. 몇 년 만에 처음이었는데 여전히 열리더군요. 그런데 게시판은 멎어 있었어요. 올라와 있던 노래들도 이제 불통인 것이 많고, 거의 폐허더군요. 이제 이 음악은 그 홈페이지 말고 시디로만 들으려 해요.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아요.    


새벽엔 다른 사람의 인생이 되어 살고, 저녁엔 제 시를 다시 써볼까 해요. 매일 이곳으로 출근해도 괜찮겠죠? 그때마다 이 곡을 틀어주세요. 달콤한 가사보다 망설이는 몸짓이 담긴 노래 말이에요. 어머, 비가 그쳤나 봐요.    




고구마 수정과 셔벗

고구마 두 개(400~500g), 계피 50g, 생강 130g, 물 2l    


삶은 슬픔에 대한 면역력을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견디고 이겨낼 힘을 얻자. 고구마는 성인병 예방에 좋고, 피로 회복과 식욕 증진에도 도움이 된다. 계피와 생강의 매운맛이 잘 어우러져 특유의 향미를 지닌 수정과를 셔벗으로 즐겨보자.    



1. 고구마를 쪄 껍질을 벗기고 곱게 으깬다.

2. 물 1리터에 계피 50g을 넣고 90분 정도 끓인다.

3. 물 1리터에 생강 130g을 넣고 90분 정도 끓인다.

4. 계피와 생강을 건져 낸다.

5. 계피를 우려낸 물에 으깬 고구마를 넣고 생강 우려낸 물을 붓는다.

6. 면포를 이용하여 수정과를 다시 한번 걸러준다.

7. 설탕을 입맛에 맞게 첨가하고 냉동실에 넣어 얼린다.

8. 얼린 수정과를 포크로 긁어 놓는다.

9. 스쿱을 이용하여 모양을 만든 후 잔에 담는다.

* 레몬이나 라임 슬라이스를 장식으로 올린다.    


최근 출간한 <쓸쓸한, 그래도 따스한>에 나오는 스무 편의 이야기 가운데 몇 편을 브런치에 나누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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