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식혜 편
모든 것은 아쉬움에서 비롯되었다.
흩어졌던 식구들이 모이는 날이면 어김없이 식탁에 식혜가 올라왔다. 겉보리의 쌉싸름한 쓴맛과 설탕의 단맛이 어떻게 섞이고 변화되었는지 말들은 많았지만, 어머니의 식혜 맛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했다. 오랜 시간 길들여졌거나, 익숙함 때문이라고 해도 딱히 반박할 말을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그 느낌을 얻을 수는 없었기에, 십여 명 가족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노모가 평생 만들어 왔던 감주, 혹은 식혜는 그렇게 오직 한 사람의 정체성이었고 가족이 공유하는 특별한 이미지였다.
동일한 시대를 살아온 여느 집처럼 우리 가족도 다양한 풍파를 만났다. 팍팍한 시대를 건너오며 힘겨운 자신만의 시절들을 겪었고, 오해와 소통의 부족으로 힘들어하기도 했다. 즐거운 날들도 있었으나 가끔은 원망으로 서로의 생채기를 보듬지 못했으며, 자주 탈출을 꿈꾸었다. 저마다의 공과를 정확하게 진단해줄 수 없는 그 시간들을 우리는 다만 견뎠을 뿐이었고, 각자의 방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지는 감정은 그것이 생면부지의 남이건, 가족이건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에 머물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실패를 겪은 후에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형제들도 한동안 그 깨달음을 얻지 못했고, 그 속에서 방향을 잃었던 것 같다.
유일하게 어머니는 모든 식구들과 기꺼이 불화하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분이셨다. 늘 떠돌았으나 꾸준히 가정의 가장자리에서 숨 쉬었던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더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자식들은 더 답답해했고 힘겨워했으나 그런 표정마저도 어머니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식구들은 차츰 희미해지는 끈을 느슨하게 잡고 있었다.
어머니의 식혜가 서서히 맛을 잃어가던 것도 그 즈음 겨울이었다. 당신도 그 사실을 아셨는지 식혜 만드는 것을 중단하겠노라 선언했다. 가족들은 그저 잊을 수 없는 맛의 소멸을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어쩌면 더 이상 공감하지 못하는 생각들처럼, 어머니의 식혜도 그 운명에 순응해야 했는지 몰랐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였으면서 동시에 옹호자였던 어머니가 마지막 식혜를 담기로 하던 날, 또 한 명의 식혜 숭배자였던 막내 손녀는 ‘기록’이라는 뜻밖의 제안을 들이밀었다. 구술로만 여러 차례 설명했을 뿐 별다른 적극성을 띠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 겨울밤 똑딱이 카메라와 녹음을 진행하는 손녀의 시선에 순순히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당신도 사라지는 존재의 안타까움을 서서히 준비하고 계셨던 까닭이었는지 모르겠다. 철부지 손녀가 수많은 시간동안 흘러왔던 가족들의 여러 시선과 감정을 알았을 리 없었을 테고, 그저 자신도 동의했던 맛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한 잔의 차가운 식혜, 달콤한 술은 지난 시절 수많은 사연들을 품은 채 한 장의 레시피로 압축되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세상사는 누구나처럼 많은 인연들과 만났다. 내 추억을 사간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아름답게 저물고 있을까? 때로 기억할 수 없는 얼굴이 그립기도 했다. 설렘 가득한 누군가와의 첫 만남에도 그랬고, 스치듯 작별을 고한 만남에서도 한 잔의 차, 혹은 음료가 있었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한 잔의 향과 색으로 기억되는 시간과 지울 수 없는 얼굴들에게 차 한 잔 만들어주고 싶었다. 어머니의 식혜 레시피를 정리하며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고, 나의 어제를 채웠던 이들과 대화하며 차 한 잔하는 풍경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게 모두를 한 자리에 소환하기 위해 카페라는 상상의 공간을 만들고, 다시 그들을 초대하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게 되었다.
“미래가 나한테 준 건 아무 것도 없어. 내 모든 희망은 과거에 있어.”
영화 <치코와 리타>에서 새해 공연을 앞두고 전화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리타의 대사는 그저 회한의 한마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던 어제에서 싹터 오른 것이 아닌 신기루 같은 내일이 아무 의미없다는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어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서야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된 리타는 47년이라는 미래의 세월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발 앞에 놓인 내일은 내가 놓치고 있던 희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식혜 레시피를 모두 완성하고 난 후, 리타의 대사는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살기 위해 과거와 제대로 작별해야 한다는 말로 새롭게 들렸다. 그렇게 스무 개의 이야기와 레시피가 함께 담기게 되었다.
가전기기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에는 식혜를 달이는 일이 며칠에 걸친 지난한 과정이었다. 온돌방에 이불을 몇 겹으로 감싸고 하던 일을, 지금은 전기밥통이 대신해준다. 그렇다 해도 밥알이 새로운 음료로 번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시간을 견뎌야 한다. 시작 시간을 잘못 잡아 새벽까지 몇 번을 거르고 끓이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아주 조금, 어머니의 지난 시간을 혼자 경험하는 시간을 느꼈다. 이해하려 한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감정의 시간들이 그렇게 그날 밤을 건너갔다.
완성된 첫 국자의 식혜는 분명 어머니의 오랜 식혜 맛은 아니었다. 식히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 달라질지라도, 온전한 그 맛은 살려내지 못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도 역시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지만,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솔직히 추억의 그 맛인지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대체 그 맛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늙은 밥통의 힘이었을까, 젊은 날의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식들에 대한 고집스런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영원히 찾지 못하고 다시 그리워하며 늙어갈지도 모르겠다. 이제 별다른 희망이 필요 없다고 느끼며 살고 있는 까닭인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이 레시피로 나는 어머니의 마음도, 내 마음도 오래도록 위로할 수 있으리라 감히 믿기로 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다.
쌀 1.6kg, 엿기름(질금) 1.6kg, 설탕 350g
가장 가까우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가족. 식혜는 생활 속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전통음료지만, 쉽사리 만들 엄두를 내기 힘든 메뉴이기도 하다. 식혜와 가족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 아닐까.
1. 먼저 엿기름(보리에 물을 부어 싹을 내어 말린 것)을 물에 넣어 3시간 이상 불린다.
2. 시간이 되면 모두 건져서 손으로 곱게 으깬 후 물을 부어 거름망과 체를 통해 걸러낸다. 4.5리터 정도의 액이 모일 때까지 반복한 후 부유물을 가라앉힌다.
3. 쌀은 쪄서 고두밥을 만든다. 찜기에 물을 담고 거름망으로 쓸 천을 깐다. 그 위에 쌀을 넣고 30분 정도를 찌면 고두밥이 완성된다. 고두밥을 찔 때는 뚜껑을 열어보고 밥알이 투명해 지는 것을 확인한다.
4. 고두밥이 완성되면 전기밥솥에 넣고 엿기름 내린 물을 첨가한 다음 보온 메뉴를 눌러 6시간을 삭힌다.
5. 밥솥에 들어간 양 만큼의 물을 미리 끓여둔다.
6. 삭히는 과정이 완료되면 두 배 용량의 들통에 삭힌 물과 같은 양의 끓인 물을 섞은 후 다시 끓인다. 이때 설탕 350g을 넣어 함께 끓인다.
7. 고두밥이 충분히 익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밥알이 뜨기 시작하면 불을 끄고 식힌다. 식힌 후 냉장고에 넣어두고 차갑게 한 후 이용하면 된다.
최근 출간한 <쓸쓸한, 그래도 따스한>에 나오는 스무 편의 이야기 가운데 몇 편을 브런치에 나누어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