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비노 카페 편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세요. 적당히 부러우면서도 경멸하는 눈빛 말이에요. 젊은 놈이 얼마나 부모 복을 타고 났으면 유럽에서도 알록달록하다는 곳에서 일 년을 뭉개다 왔느냐 하는 따가움이 벌써 느껴지네요. 오해는 마세요.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여행을 다녀올 만큼 여유 있는 집안 자손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전세금을 빼서 다녀올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도 못하답니다.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고 갔어야 했는데 뭐 그렇게 됐네요. 제가 스케줄을 착각해 급하게 떠나다보니 여러 곳에 안부를 전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된 거냐고요? 일하러 갔다 왔어요. 일 년 동안 프랑스 포도밭에서요. 보통 와이너리라고 하죠. 포도농사를 지어서 와인을 만드는 곳 말이에요. 프랑스에선 샤또, 도멘 뭐 다양하게 부르죠. 일용직 아르바이트 농부라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제가 그 업계 일을 잠시 해본 건 아시잖아요. 와인도 물론 좋아하고요. 아무튼 농사일 배우러 다녀왔다고 생각해주세요.
가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그는 자주 자신의 것이 아닌듯한 요란한 웃음을 던지고는 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들렀던 그의 부재를 깨달은 건 3개월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문득 끊긴 음악처럼, 트랙과 트랙 사이의 공백처럼 짧게 그리웠던 그의 얼굴이 옅게 로스팅한 원두같이 그을린 피부로 돌아왔다.
이건 죄송하단 뜻에서, 오랜만에 뵙는 반가움에 드리는 선물이에요. 별건 아니에요. 일 끝나고 혼자 한잔 하세요. 비싼 것도 아니고 클라레Claret라고,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죠. 보르도 아시죠? 클라레는 중세 시대부터 20세기 전까지 영국인들이 보르도 지역의 레드 와인을 일반적으로 지칭했던 말인데, 연하다는 뜻의 불어에서 따왔더군요. 사장님은 와인도 즐기시니까 잘 아시겠네요. 보르도 와인하면 묵직하고 짙은 색깔의 대표적인 프랑스 와인이잖아요.
보르도 와인의 주요 수입국이 영국인데요, 아키텐이라 부르는 지금의 보르도지역 공작의 딸과 나중에 영국왕이 되는 헨리 2세가 결혼을 하고부터 영국이 프랑스 와인의 주 고객이 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대단한 보르도 와인처럼 품질이 좋아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더군요. 이전까지만 해도 보르도 레드 와인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연하고 타닌도 많지 않았는데, 이런 스타일의 와인을 부르던 용어가 바로 클라레인 거죠.
손에 쥔 와인 한 병으로도 그의 데시벨은 우상향 곡선을 그린다. 그러고 보니 그가 역사를 전공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옛날이야기 때문인지, 와인 때문인지 그의 방문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는 늘 묻지 않은 것도 답한다.
우선 커피 한 잔 주시면 안 될까요? 프랑스라고 하니 에펠탑에 샹젤리제를 생각하시겠지만 거긴 뭐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만 봤어요. 관광이 아니었다니까요. 대부분은 360도 고개를 돌려봐야 가도 가도 포도밭만 있는 곳이었죠. 그냥 여기 시골처럼. 아, 풍경은 좀 멋진 그런 시골이었어요. 제가 에티오피아 커피 좋아하잖아요. 내추럴로 가공한 것. 향이 죽이잖아요. 거기서는 그런 커피를 볶아서 내려 마시는 호사를 부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 향기를 다 잊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아, 역시 좋군요. 고향에 온 것 같아요. 이따 갈 때 원두를 한 봉지 사가야겠어요.
돈도 벌면서 일도 배우고 싶었어요. 우리나라도 일손이 부족해 수확철에 잠깐 일하는 아르바이트는 많이들 하잖아요. 제주도 감귤 농장 아르바이트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건 배우는 것도 없고 오로지 돈 벌려고 하는 거니까. 그럴 수는 없었어요. 아직 서른이 되기 전이라 워킹 홀리데이 비자도 받을 수 있어서, 포도밭에 일자리를 구했죠. 무엇이든 해볼 수 있겠지 생각했는 데 일을 구하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포도나무에 포도 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확해서 와인 만드는 것까지 다 보려면 일년 내내 붙어있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해야 되는데 잘 안 뽑아주더라고요. 수십 곳에 이력서를 보냈는데 겨우 한자리 구할 수 있었어요. 그것도 와인 회사에서 일한 경력이랑 조금 허풍을 떨어서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예전에 상영한 프랑스 영화 혹시 보셨어요? 사계절동안 부르고뉴Bourgogne 포도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거기에서도 수확철이면 일용직 인부들을 쓰죠. 비슷해요. 다만 전 포도나무 가지가 자랄 때부터 시작해서 수확해서 와인을 양조하는 일 년을 모두 지켜봤죠. 그곳 사람들은 삶 자체가 굉장히 여유로워요. 도시는 다르겠지만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도 좀 더 너그럽고 여유 있는 모습이 보여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와이너리 딸과의 로맨스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요. 그러고 보니 그 영화도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아들이 나오는군요.
술도가 집 아들이었던 할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었다고 해요. 돈은 좀 있었지만 집은 잘 돌보지 않고 자신의 행복한 하루하루만을 위해 사신 분. 할머니를 막 대하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는 절대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대요. 아버지가 도시로 나와 고등학교를 다닐 즈음 그 많던 재산은 남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고, 할아버지는 얼마 후 병으로 돌아가셨대요. 아버지는 학교를 졸업하고 이것저것 손대다가 호주로 건너가셨는데 이것저것 안 해본 것이 없을 만큼 고생 하셨대요. 그러다가 우연히 아는 분의 소개로 주류도매상 일을 배우게 되었죠. 자신이 평생 혐오하던 알코올이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그 일을 받아들이셨죠.
어쨌든 그 일이 생계를 유지하게 해주었죠. 열심히 하셨고 제가 태어날 무렵엔 어느 정도 기반을 닦으셨대요. 제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한국으로 나오셨죠. 한국에서도 생활수준이 올라가면서 와인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자 와인 수입을 전문으로 하기 시작하셨어요. 와인이 아무래도 돈이 있어야 즐길 수 있으니 여유가 있는 계층의 사람들과도 교류하셨고, 자연스레 자신도 와인을 시음하며 와인에 빠져드셨을 거예요. 그리고 유럽 와이너리들과 교분이 생기면서 조금씩 업계에서 입지도 다져가셨죠. 하지만 수입상이 늘어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조금씩 힘들어지셨어요. 결국 다 정리하고 지금은 이탈리아에 가 계세요. 돈은 그리 없지만 그동안의 친분덕택에 여생은 그곳에서 보내실 것 같아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그 방탕함에 질려서인지 제게 엄격하셨어요. 잘 세운 계획에 성실하기를 원하셨죠. 가장으로서 해야 할 바였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에 대한 반발이 저에 대한 구속으로 나타난 게 아니었던가 싶어요. 저는 그 꽉 매인 생활이 싫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줄곧 혼자 지냈죠. 그런데 웃긴 건 역사를 전공했는데, 와인숍에서 한 아르바이트가 제 진로를 바꾸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아버지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꽤 많았나 봐요. 수입사에서 일해주길 원하더라고요.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중간 중간 일을 도와주다 결국 와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었어요. 어쨌든 지금은 역사와 와인 둘 다 해보고 싶어요. 더 큰 곳에서 더 깊게 일하다보면 길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무작정 떠난 거죠.
포도밭의 일 년은 참 바빠요. 가지가 높게 자라 무게 때문에 옆으로 처지기 시작하면 포도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 있게 포도밭에 설치된 케이블의 위치를 조정해주어야 해요. 포도나무에 중복으로 자란 줄기를 제거해주는 일도 해야 해요. 영양분이 분산되는 것을 막아야 최고 품질로 자랄 수 있으니까요. 잎도 따로 제거를 해요. 밤새 포도 열매에 앉은 습기를 제거하거나 양분 낭비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한여름에는 미성숙한 포도를 제거해 남아있는 포도의 산도와 당도를 높이는 작업도 하죠. 감염되었거나 알이 작은 포도, 잎이 없는 줄기에 자란 포도 등은 미리 떼어줘야 해요. 양분을 모두 나눠가지다가는 좋은 품질을 얻을 수 없거든요. 드디어 열매가 다 익으면 수확하느라 또 한참을 보내죠. 수확할 때만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기도 해요. 그 일만 해서는 포도밭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는데, 저는 그래도 행운이었던 거죠.
수확을 하고도 많은 작업이 기다려요. 본격적으로 와인을 만드는 시간인 거죠. 발효하는 기간에도 그냥 담아둔 채로 두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스를 뿌리고 섞어주고, 효모를 추가하고 설탕을 추가하고 하는 작업들이 이어져요. 그리고 본격적인 숙성에 들어가게 돼요. 그래도 한 해의 작업이 모두 끝나고 벌였던 와인 파티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일 년 동안 흘러가는 시스템을 잘 보고 나면 회사에 다시 들어가서 일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라고 그저 막연하게 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많아 졌어요.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가는 일을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포도나무 잎을 솎아내고 열매를 관리하고, 발효시키고 하는 과정들을 해보면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한 모습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고 할까요. 거대한 조직에 붙은 가지가 되어 가지치기를 당하는 것보다,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역사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기도 하고, 작가가 되어보고 싶기도 해요. 정해진 건 없어요. 흘러가는 것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따라 고정해두지 않고, 고집하지 않고 유연해져 보려고요.
애를 써도 털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넓은 포도밭에 서서 지평선 쪽을 바라보다 보면 이 사람들의 몸에 흘러내리는 포도주처럼, 제 몸에도 흘러내리는 무언가가 있지 싶더라고요. 속박한다고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떠난다고 돌보지 않는 것도 아니죠. 돌아오고 떠나고 반복하는 거 아닐까요. 매번 같은 일을 하지만 매번 다른 가지를 손질하고 매번 다른 열매를 숙성시키는 일이 와인을 만드는 일이니까요.
중세 시대에는 평민들에게 와인이 그저 물과 같은 존재였대요. 물을 타서 희석해 먹기도 하고 임금으로 포도주를 받기도 했죠. 지금처럼 특별한 날에나 먹는 대단한 기호식품이 아니었던 거죠. 클라레는 매일 식탁에 오르는 그런 와인이죠.
가족도 그런 거 아닐까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매일 보면서 웃어주는 사람. 우리가 마시는 와인에는 포도 알맹이만 들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껍질도, 가끔은 줄기도 함께 넣는데 즙과 부대끼면서 좋은 와인이 탄생하기도 하죠.
아버지를 만나러 한번 다녀올까 해요. 아버지가 절 반겨줄 지는 모르지만요. 그때는 이탈리아 와인 한 병 가져다 드릴게요. 아, 이 원두 한 봉지 챙겨두셨죠?
오래전 파리를 여행하고 온 지인이 가져다 준 사진집이 있다. 그중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 찍은 몇 장의 흑백사진 중에 유난히 귀여운 아이의 사진이 있다. 아마도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가게에서 와인을 받아 들고 오는 길일 텐데, 마치 콧노래를 부르는 듯한 아이의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커다란 병에 담긴 삶의 무게를 아이는 알고 있었을까. 다음에 그가 오면 사진을 액자에 넣어 선물로 주어야겠다.
레드 와인 100ml, 콜드 브루 120ml, 설탕 60g, 오렌지 1개, 복숭아 1개, 로즈마리 1개
레드 와인에 들어 있는 폴리페놀 성분은 항산화작용을 하여 젊음을 유지하고 면역력을 키우는 효과가 있다. 과일과 와인을 함께 넣어 마시는 따뜻한 음료인 뱅쇼와 다르게, 과일의 향미를 돋보이게 하는 콜드브루 커피와 와인, 그리고 과일과 곁들이는 음료로 젊은 날의 용기와 뜨거움을 응원하고 싶다.
1. 커피 100g과 물 800ml를 이용하여 냉장 상태에서 콜드 브루를 만든다. 냉장 상태에서는 카페인이 조금 더 줄어들고, 콜드 브루는 과일의 향을 강조시켜 준다. 판매되는 소형 점적식 콜드 브루 도구를 이용하면 된다.
2. 오렌지와 복숭아 한 개를 슬라이스 하여 잘라준다.
3. 자른 오렌지와 복숭아 중 1개씩은 로즈마리와 함께 사용하기 위해 따로 보관한다.
4. 레드 와인, 콜드 브루, 설탕을 한꺼번에 넣고 끓인다.
5. 끓기 시작하면 약 5분간 강불 후 10분간 약불로 끓인 후 식힌다.
6. 잔에 오렌지 슬라이스와 복숭아 슬라이스를 넣는다.
7. 얼음을 넣고 식힌 음료를 그 위에 부어준다.
8. 로즈마리로 장식해 마무리한다.
최근 출간한 <쓸쓸한, 그래도 따스한>에 나오는 스무 편의 이야기 가운데 몇 편을 브런치에 나누어 소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