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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Mar 21. 2021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와인의 맛

영화 <Uncorked>와 당신의 꿈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고 치자, 당신을 위해 규모까지 늘리면서 당신이 가업을 이어가길 바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는 당신은 젊고 관심은 레스토랑 운영에 있지 않다는 것. 아버지는 이미 나이 들었고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가업은 새로운 갈림길에 서 있다면?     


너무 쉬운 질문이었을까. 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고, 계층 간 경제적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현실에서 선택이란 의미 없다고 답할 수도 있겠다. 이 불안한 시대에 안정적인 생활보다 중요한 게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감히 네 꿈을 따라가라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럴 기회조차 없다는 현실이 답답할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 선택이 옳은 것이었는지 장담할 사람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시대가 어수선할 뿐 배부르다고 좋은 삶은 아니니까 말이다.      


미국 남부의 도시 멤피스. 아버지가 운영하는 바비큐 레스토랑에서 일을 돕는 일라이자(Elijah)는 아버지의 가게보다는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와인 매장에서 더 눈이 빛난다. 아버지 루이스(Louis)는 가업인 바비큐 사업을 인수하길 원하는데도 와인에 빠져있는 아들이 영 마뜩잖다.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새롭게 문을 여는 2호점에 바를 설치해 와인을 서빙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지만 마스터 소믈리에가 되는 것을 꿈꾸는 일라이자는 와인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급기야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파리에 가기로 결정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일라이자는 떠나기 전 날 밤 아버지와 아들이 만든 바롤로 와인을 건네며 미안한 마음을 전하려 하지만 아버지는 냉정하게 대하고 만다.     



루이스가 아들의 행보에 지지를 보내지 못하는 나름의 이유는 있다. 일라이자가 이전에 자신의 꿈이라고 이야기했던 것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보다는 가족을 위해 아들이 헌신하길 바라는 마음 것 때문이다. 하지 않아야 할 이유와 해야 할 이유를 모두 지니고 있는 셈이다. 사실 루이스도 한때는 교사가 되는 꿈을 꾸었지만 무일푼에서 시작해 가업을 일으킨 아버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업은 커졌고 이제 자신도 늙었다. 부모에게 자식만큼 든든한 지원군이 없다는 사실을 아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가업승계가 그저 “재산을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경영자의 창업정신, 경영 노하우 등 무형자산까지 이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때 승계자의 능력이나 의지는 매우 중요한 승계 요건이다. 가업을 이을 승계자가 헌신과 노력을 다하지 않고 재산 증식에만 몰두하거나 가업의 의미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불투명할 것이다. 가업을 잇는 것이 우리나라보다 활발한 일본은 중소기업 경영자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지만 자녀수의 감소, 자녀들의 전통산업 기피, 자녀들의 역량 부족 등을 이유로 중소기업의 후계자 선정이 적기에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로는 ‘적합한 후계자 선정의 어려움’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고 한다.(日 중소기업청 2017년 설문조사) 가업 승계는 단순한 재산의 대물림, 그 이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암이 재발한 엄마의 병세 악화와 친구의 진로 변경 등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결국 와인 학교를 접은 일라이자는 아버지 곁에서 묵묵히 일을 돕는다. 특별한 화해의 몸짓이나 말이 없어도 서로에게 상대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늦은 고백은 일라이자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      


“해야 되니까 했지, 사실 꿈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어.”     


학교는 그만두었지만 예정된 자격시험을 치르는 일라이자. 모든 시험이 끝나고 결과만 기다리는 호텔방에 아버지가 찾아오고, 파리로 떠나기 전 내밀었던 와인을 내밀며 둘 만의 시간을 가진다. 가업을 물려주려는 아버지와 와인업계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아들 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가족 간의 관계를 그린 영화 <와인을 딸 시간(Uncorked)>는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따라가지만 그렇다고 그럴싸한 해결을 택하지는 않는다. 화해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된다는 식의 결말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훌륭한 와인이 시간을 가지고 오크통에서 숙성되듯 일라이자의 꿈도 그 길을 따라가게 될 것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포스터에 있는 부제(Uncorked : some dreams can’t stay bottled up)처럼 억누를 수 없는 꿈이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일과 아들의 일이 완전히 다른 길도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곳곳에서 노출시킨다. 영화는 시작 부분부터 자신만의 바비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루이스의 노력과 복잡한 와인 양조 과정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농구 경기를 시청하며 술집에 들른 일라이자가 자신이라면 훈제고기에는 바롤로를, 닭고기에는 진판델을 곁들이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하는 장면도 자신의 꿈이 아버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대복이다. 영화는 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보다는 해야 할 이유를 찾아가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방법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와인 영화답게 수많은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와인 자격시험에 대한 정보도 살짝 엿볼 수 있고, 입에 침이 고일만큼 다양한 와인이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의도적인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에서는 이탈리아 와인, 특히 바롤로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화해를 위한 매개로 슬쩍 놓아두는 와인도 이탈리아 와인 바롤로다. 영화에 나온 바롤로는 티지아노 그라소(Tiziano Grasso)의 ‘La Briccolina Barolo DOCG’라는 와인이다.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으로 손꼽히는 바롤로 와인은 네비올로(Nebbiolo) 품종으로 만들어지며,  바롤로를 포함한 인근 11개의 마을에서 생산된다. 같은 포도를 생산하지만 서쪽과 동쪽의 토양이 달라 뉘앙스의 차이를 보여주는데 브리콜리나 와인은 동쪽 지역인 세랄룽가 달바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이다. 라 브리꼴리나(La Briccolina)는 1923년 그라소 가문이 세운 회사로 세랄룽가 달바(Serralunga d’Alba)의 포도밭 중 하나인 브리꼴리나(Briccolina)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주로 다른 회사에 네비올로를 판매해오던 그라소 가문은 티지아노 그라소에 이르러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티지아노는 아들 다니엘레의 도움을 받아 직접 바롤로를 생산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처음으로 병입한 와인의 빈티지가 2012년이었다. 바로 영화에 나온 그 빈티지다. 안타깝게도 티지아노(Tiziano)가 2017년 갑자기 사망하면서 아들 다니엘레(Daniele)가 이 와인의 생산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는 포도재배에서 와인 생산이라는 새로운 길을 걸었고, 아들은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야 하는 임무를 넘겨받은 셈이다.      


소믈리에 시험 중에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와인을 알아맞히는 과정이 있다. 지식뿐만 아니라 오감을 동원해야 해결할 수 있는 과정이다. 그때는 외운 대로 들은 대로 이야기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맞을지 틀릴지 모르지만 오로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한다. 영화 시작 지점의 타이틀처럼 꿈에 관한 한 당신의 생각을 이제 말해야 할 시간이다.    

 

“A Penny for Your Thoughts(네 생각을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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