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뿐인숲 May 22. 2020

‘어제 다음날’에게 ‘오늘’이 말하다

이번 생은 폭망이라 느낄 때 보는 <사이드웨이(Sideways>

저마다 특별한 존재를 꿈꾸던 시간이 있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잠재력이 내게 있다고 믿는 때가 있다. 인내와 열정을 통해 숨겨진 뛰어남을 뽐내리라. 두루뭉술하게 세상과 타협하려는 그 어떤 유혹과도 어울리지 않으리. 그리하여 비록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으리. 그렇게 다짐하는 계절이 있다.     


하지만 늦여름의 태양이 지평선에 채 다 걸리지도 않을 때쯤이면 대부분 알게 된다. 땅에 서있는 수많은 것들 중에 내가 최고가 아님을, 누구나 부러운 얼굴로 쳐다볼 만큼 영글지 못했음을 자각하는 날도 온다. 그저 풋내기로 늙어 아무도 손길 내밀어 주지 않게 되어버렸음을 인정하는 순간이.    

  

이것은 포도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혹 당신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나와 당신, 지금 주저앉아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와인 꽤나 마신다면 모두 보았다는 그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는 그런 난감함에 대한 이야기다.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 여기는 마일즈는 이혼남이다. 아마도 자신의 찌질함, 혹은 무능력함 때문에 헤어졌을지 모를 옛 아내를 잊지 못하며, 결혼 10주년에 마시려던 1961년산 슈발 블랑을 아직 장식장에 보관하고 있는 영어교사다. 오해는 말자. 미국은 한국과 달리 주마다, 지역교육구마다 다른 교원 임용방식과 처우, 급여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임용과 동시에 정년 보장과 연금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각종 평가와 심사가 이어지고 다양한 방식에 의해 정년이 인정된다. 종신 재직권이 없는 교사들은 매년 새로운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한다. 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2년에서 4년이 지나고 교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 종신 재직권이 주어진다. 풀 타임, 파트 타임 그 형태도 다양하다.(출처: 2014년 교육부 정책연구개발사업 『외국교원의 근무유형 분석 정책 시사 연구』) 마일즈의 상태는 딱 그 언저리에 있다.     


게다가 한 번도 불황이지 않았던 적 없던 출판시장은 여전히 불황이고, 소설가를 꿈꾸는 그의 작품은 끝내 어느 출판사의 선택도 받지 못했다. 원고는 인쇄되지 못한 채 자신의 차 안 상자에 보관 중이다. 그를 위로해 줄 것은 오직 와인뿐이다. 그래서 친구와 떠난 와이너리 여행에서 만난 여인 마야와의 만남도 그리 설레지 않다. 즐거운 순간은 와인 이야기를 나눌 때뿐이다.     


재치 있고 익살 맞는 대사, 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수많은 붉은 빛의 와인 등 볼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사이드웨이>는 마일즈와 마야가 처음 진지하게 시라를 마시며 좋아하는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던 저녁, 친구의 결혼식이 끝난 후 햄버거 가게에서 1961년 슈발 블랑을 숨겨가며 홀로 종이컵에 따라 마시던 마일즈의 모습, 두 장면에 모두 담겨 있다.     


마일즈는 품종에 집착한다. 그가 혹평을 마다하지 않는 메를로(Merlot)는 자신과 닮지 않았다. 두루뭉술한 성격의 메를로는 적당한 단맛과 부드러움을 지닌 품종이다. 토양과 기후의 특성을 덜 타서 재배에도 유리하다. 그렇다고 마냥 별 볼일 없는 포도가 아니다. 그 유명한 샤도 페트루스(Chateau Petrus)처럼 메를로의 가치를 보여주는 와인도 많다. 여러모로 마일즈의 삶은 메를로와는 참 많이 멀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마일즈는 마야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면서도 피노 누아(Pinot Noir)에 대한 예찬을 이어간다.      


“피노는 기르기 힘든 포도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껍질도 두껍고 까다롭고, 일찍 익어버리죠. 어느 곳에서든 자라고 소홀하게 하더라도 무성하게 자라는 카베르네 같은 승자가 아니죠. 피노는 끊임없는 관심과 주의가 필요해요. 최고의 인내심을 지니고 키우는 사람들만 그 일이 가능하고 피노의 섬세함에 다가설 수 있어요.”     


마일즈는 피노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의 삶이 그렇다고 믿는 듯하다. 물론 기대하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잠재력을 펼치지 못한 피노 누아는 바로 자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자기기만일 수도 있다. 훌륭한 피노가 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조화롭지 못한 와인이 되리라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메를로를 비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1961년산 슈발 블랑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 그 근거다. 슈발 블랑은 정작 피노 누아는 찾아볼 수 없고 메를로와 카베르네의 블렌딩으로 만들어진 고급 와인이기 때문이다.     

 

샤또 슈발 블랑(Chateau Cheval Blanc)은 보르도 생테밀리옹 지역을 대표하는 초특급 와인으로 흰 말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와이너리 설명에 따르면 61년은 아주 뛰어났던 해로 5월29일에 내린 서리때문에 헥타르당 11헥토리터로 수확이 감소했지만, 건조한 여름 날씨가 완벽한 성숙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2009년 루이뷔통 회사 명의로 바뀌게 되었으며, 샤또 디켐 과 함께 LVMH그룹의 자회사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햄버거 가게에서 종이컵에 몰래 따라 마시는 슈발 블랑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꿈이고, 자신은 잠재력을 펼치지 못한 피노에 불과하다는 체념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품종을 이야기하는 마일즈에 비해 마야는 와인의 삶 전체를 이야기한다. 이혼을 하고 레스토랑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꿈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그녀는 하나의 품종에 연연하지 않는다. 대신 와인의 일생을 통해 삶의 궤적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      


“난 와인의 일생에 대해 생각하길 좋아해요. 살아있으니까요. 포도가 자라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하죠. 여름의 태양은 얼마나 눈부신지, 비는 어땠는지…포도를 돌보거나 수확하는 사람들도요. 만약 오래된 와인이라면 그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은 죽었겠죠. 와인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사랑해요. 내가 한 병을 여는 그 순간마다 매번 다른 맛을 보게 되겠죠. 한 병의 와인은 진짜 살아있으니가요. 끊임없이 진화하고 복잡함을 얻어갈 거예요. 최고에 다다를 때까지, 당신의 61년산 슈발 블랑처럼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점차 소멸해가겠죠.”    

 



한동안 커피든 와인이든 싱글에 집착했다. 원두, 혹은 품종에 담긴 맛과 향을 찾아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때그때 상태가 다른 생두를 가공해야 하는 싱글 오리진(동일 지역에서 재배한 단일 품종의 원두) 커피는 대개 비슷한(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는) 맛을 추구한다. 그런데 싱글의 상태에 따라 커피의 품질이 천차만별이다. 어제도 느꼈던 에피오피아 재래종 내추럴과 콜롬비아 아길라 워시드의 맛을 얼마나 잘 구현해내느냐는, 그래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산지오베제(Sangiovese)와 바르베라(Barbera)가 날카로운 신맛을 넘어서고, 네비올로(Nebbiolo)가 농밀한 촉감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예상 가능한(기대하는) 맛들의 구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두를 볶아 파는 로스터리 카페에서는 흔히 ‘오늘의 커피’로 불리는 블렌드 커피를 찾게 되었다. 기대한 맛에 대한 호불호보다는 새로운 느낌을 얻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력을 평가하는 고단한 일보다는 그곳이 가진 매력이 어떠한지 찾아보는 즐거운 시간이 카페에서는 필요하니까 말이다. 슈퍼투스칸(Super Tuscan)이라 불리는 마렘마(Maremma)지역 블렌딩 와인의 명성도, 고가에 팔려나가는 보르도(Bordeaux) 블렌딩 와인의 저력도 바로 그 다양한 포도들이 펼쳐 보이는 ‘매력’때문이 아닐까. 커피와 와인의 매력은 어떤 맛을 잘 살려내었느냐에 있지 않고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느냐에 있을 것이다. 삶이 그런 것처럼.      


세상의 변덕스러움은 외면했으나 삶이 지닌 작은 변화도 의미 있게 바라보는 마야의 마음은 움직인 마일즈의 소설 제목은 ‘어제 다음날(The Nextday of Yesterday)’이다. 어제 다음날과 오늘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제 다음 날’이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날이라는 의미, 아니면 어제와는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는 날이라는 의미처럼 매일 매일을 전날과 비교하는 삶이라 한다면, ‘오늘’은 어제와 내일과는 별개의 하루다. 어제와 비교되는 태양이 아니라 그저 변화하고 있는 오늘의 태양이다.     


어제와 비교하는 비루한 삶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간에 일어난 일들과 익어가며 서서히 드러나는 모든 것들에 감탄하는 삶이 우리가 와인에게서 얻는 가장 큰 즐거움은 아닐까.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그 변화는 진보와 퇴화가 아니라 그냥 진화(evolution)일 뿐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좋거나 나쁜 어제가 아니라, 그냥 오늘일 뿐이다. 실력보다 매력을 보여주는 삶은 그래서 아름답다. 여러 번 돌려보는, 볼 때마다 새로운 이 영화처럼.          


#사이드웨이 #피노누아 #메를로 #사랑 #와인 #커피 #와인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돈이 아닌 이야기를 바꾸실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