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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Mar 28. 2020

돈이 아닌 이야기를 바꾸실래요?

타이베이 카페스토리 Taipei Exchange 第36個故事

가격표를 붙여. 그래야 효율적이야.     


자본주의와 함께 화폐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사물은 그것이 지닌 사용가치를 잃어버렸다. “가격표가 붙지 않는 거래는 모조리 무시하는 산업사회는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도시의 풍경을 만들었다”고 한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그 어떤 사물이나 활동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도시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여기 물물교환으로만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는 카페가 있다. 커피와 디저트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가게에 있는 다른 물건은 오로지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으로만 교환된다. 물론 그것도 합의가 될 때만 가능하다. 서로 판이한 성격의 두 자매 두얼과 창얼이 도시 한복판에 오픈한 ‘두얼카페(朵兒咖啡館)’가 바로 그곳이다.

     

개업식 전부터 자동차 사고가 나는가 하면, 꽃 선물을 대신해 받은 개업선물은 잡동사니가 되어 카페를 어수선하게 한다. 시간이 지나도 손님들의 발길도 뜸하기만 하다. 우아한 카페를 창업하려던 꿈이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한숨짓던 순간. 창얼은 개업선물로 받은 잡동사니들의 물물교환을 제안하고, 그 시도가 단번에 이곳을 관광객이 밀려드는 타이베이의 명소로 만든다. 가격표가 의미하는 효율은 이곳에는 없다.     


오직 돈이 아닌 물건으로만 바꿀 수 있지만, 그 물건이 때론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노래가 되기도 한다. 두얼이 사고 싶었던 퍼그 장식품을 가진 승무원이 그냥 주려하자 그 대가로 창얼은 자신과 언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의 물음에 세계여행을 택했던 창얼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곳곳을 떠돌았다. 공부를 선택한 두얼은 지식과 좋은 직장을 얻었지만 창얼이 전해주는 이야기로만 세계를 바라보았다.      


이 물건들은 제가 세계를 본 창문이에요.
언니는 여행을 해 본적이 없죠.
그래서 다른 이들과 물건을 바꾸는 걸 선택한 거예요.
모르던 이야기를 더 많이 알려주니까요.   


가보지 않았다는 것이 그곳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은 아니다.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해봐서 안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진실은 아니다. 이야기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여권은 그저 휴지조각에 다름 아니다.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피에르 바야르는 “구체적인 이동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여행자가 어떤 장소를 대체 몇 킬로미터나 돌아다녀야 그 장소를 안다고 할 수 있는지가 모호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평생 똑같은 장소에서 살아도 그곳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카페는 커피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교환하는 공간이다. 커피가 내 입안으로 들어오고 나의 이야기가 다른 공간으로 흘러나간다. 돈을 넣고 물건을 빼내기만 하는 자판기와는 다르다. 수많은 삶이 교차하고 얽히며 새로운 이야기(text)로 만들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두얼카페는 이제 커피를 마시러 오는 길에 교환을 하게 되는 것인지, 교환을 하러 왔다가 커피를 마시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이다. 창얼의 아이디어로 독특한 테마를 갖추게 된 카페는 마케팅에 성공해 사람들로 붐빈다. 하지만 두얼은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다. 물물교환에 밀려 “나의 기술이 뒤로 밀려나는 것이 싫다”고 고백한다.     



두얼은 라떼에 크림을 스푼으로 동그랗게만 올린다. 꽃을 그리면 우유 거품에 가려 크레마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것이다. 우아하지 않아도 수익이 나는 상황이 있고, 크레마 풍부한 에스프레소와 요일마다 다양한 디저트보다 흥미로운 소재가 카페의 정체성을 대신하기도 한다. 내 것을 내어주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교환은 사실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니까. 커피도 마찬가지다.     


원초적 형태의 커피인 에스프레소는 드립 커피와 달리 다양한 커피 성분에서 물에 녹지 않는 불용성 성분인 커피 오일과 콜로이드까지 뽑아낸 것이다. 바디감(진한 농도)과 크리미함도 얻을 수 있다. 크레마는 커피 표면에 형성되는 거품을 말한다. 고압의 물이 원두 속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면서 생긴다. 커피 추출액이 에스프레소머신 내부의 고압력에서 대기 중의 낮은 압력으로 나오면서 흡수했던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가고 그 표면에 기포가 생기는 것이다. 그 거품이 크레마다. 에스프레소에서 중요하다고 느끼지만 사실 원두가 신선하다는 것과 색이 어두울수록 에스프레소의 농도가 짙다는 외적 표현이다. 순간적으로 밝게 보이는 것은 거품에 빛이 굴절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두얼은 35개의 서로 다른 비누에 담긴 35개의 도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에게 매혹되고, 새로운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를 찾으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하지만 비누에 담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던 남자가 비누를 바꾸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야기는 방향을 선회한다.      


“제 마음도 변했어요. 35개의 비누를 바꾸지 않을래요. 말하고 보니. 모두 제 기억들이더라구요.”
“그림은 가져가지 말아요.”
“당연히 가져가도 되죠. 제가 말한 35개의 이야기와 이 그림을 바꾸는 거잖아요.”     


남자가 가버리자 두얼은 자신 속의 또 다른 나와 대화하며 화가 난 자신에게 말한다.


너는 커피를 파는 사람이야.
 커피 체리를 팔 필요는 없어.
사람들한테 디저트를 파는 거지 밀가루를 팔 필요 없잖아.
그런 이야기는 누구든 할 수 있어.
그게 진짠지 가짜이지 어떻게 알아.
그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겠지.


두얼에게는 그와의 현실적인 진전보다 “지금 그가 나의 그림을 가지고 있고, 난 그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인생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특색 있는 카페에 대한 여행사의 투자 제안이 들어오고 두얼은 자신의 지분을 35개 도시의 비행기표와 맞교환할 것을 제안한다. 끊임없이 목표를 강조해온 엄마. 돈을 모으는 것은 목표고, 세계 여행은 헛된 꿈이라 강조했지만, 이제 두 자매는 목표와 꿈을 맞교환한다. 두얼은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을 통해 돌아다닐 준비도 마쳤다. 자신의 카페도 ‘소파객’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 내준바 있기 때문이다. 카우치 서핑은 잘 만한 소파(couch)를 찾아다닌다는 뜻으로, 현지인이 제공하는 숙소에 여행자가 머무르는 일종의 인터넷 여행자 네트워크를 말한다. 호스트들이 방이나 소파를 공짜로 내어주는 이유는 자신의 집을 문화 교류의 장으로 만들어 여행을 가지 않고도 관심 가는 나라의 문화를 배우고 알아가기 위한 것이다. 각 국의 음식, 영화, 음악, 또 개인적인 서로의 취미를 공유하는 것인데 돈이 아닌 문화의 물물교환인 셈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 다큐멘터리의 형식처럼 행해지던 질문도 그 형식을 바꾼다. ‘카라꽃과  돈’ ‘공부와 세계여행’ ‘이것과 저것’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묻던 감독은 이제 구체적인 답을 요구한다.     


당신 마음속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인가요?     


한편 그림을 가지고 떠났던 남자는 자신이 비행기 부기장이었다고 밝히며 자신의 이야기는 모두 자신의 지난날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림을 돌려보낸 편지에서 나중에 그녀의 곁에서 커피를 만들고 자신을 위해 36번째 도시의 그림을 그려줄 있느냐고 묻는다.     



그녀가 35개 도시를 모두 돌아볼지, 그 여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놓친 부분을 채워올지, 부기장을 위해 마지막 도시의 그림을 그리게 될지, 그녀의 여행은 어디서 멈추게 될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가 에스프레소를 내리던 자리에 부기장이 서 있고, 그가 조종했을지 모를 비행기에 이제 그녀가 앉아 있다. 무엇이 교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감독의 질문처럼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들이 서서히 알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누군가와 나눌 물건, 혹은 이야기를 호주머니에 지니고 있다면 좋겠다.     


다른 사람과 물건을 바꾸는 건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아.
어느 날이 되면 내 이야기도 사람들과 바꿔야지.     

p.s.

지나치게 예쁘게 포장된 카페 내부와 도시의 풍경이 이 영화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이야기보다 색깔과 분위기에 먼저 젖어드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양도되어진 카페는 영화와 달리 지독하게 현실의 벽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영화 발표 이후 수많은 순례객들의 방문으로 인기몰이를 했던 두얼카페(朵兒咖啡館, daughter's cafe)는 2015년 폐업해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물론 짐작하는 것처럼 임대료 인상이 그 이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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