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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Mar 03. 2020

미움 받지 않을 용기를 위하여

영화 <산타 비토리아의 비밀>, 그리고 베르무트 와인

퇴임이 그리 멀지않은 교사가 있었다. 상치 교사(학생 수 감소에 따른 교원 수급 불균형으로 중고등학교에서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교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였기에 수업은 부실했다. 인자하지는 않았으나 유머가 있었고 자신이 해줄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이들의 원망, 혹은 경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학교 밖에서 아이들은 가끔 대폿집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는 사랑받지 않았으나 미움 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최고의 대학을 나온 중년의 깡마른 선생은 고작(?) 교사가 된 자신이 못마땅한지 늘 웃음이 없었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자주 한심한 듯 쳐다보았고 애써 이해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 탄복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그의 명쾌한 해설에 고개를 숙였고, 잦은 언어폭력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퇴근길에 퍽치기를 다해 심각한 상해를 입고 연이은 불행에 서둘러 학교를 떠났지만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위로한 아이들은 없었다. 경멸받지는 않았으나 미움을 받은 사람이었다.      


시대는 자주 사람을 혼돈에 빠뜨리고 선택을 강요한다. 그리고 미로에 갇힌 사람들은 다리를 절며 길을 찾거나, 아니면 강도가 되어 길을 벗어나려 한다. 순간순간 선택은 달라지고 그 선택의 얼굴은 수 만 가지 표정이겠지만,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있는지 물음에 답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이 영화는 그것을 묻는 진지한 코미디다.         


1945년 4월 어느 날. “학교도 지어주고 길도 내어준다고 약속했”던 무솔리니가 죽었다.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역 알바(Alba) 근처의 마을 산타 비토리아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파시즘의 그림자도 완전히 사라질 모양이다. 그러자 술 마시기 좋아하고 가정보다 이웃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와인판매상 봄볼리니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 대규모 공공 토목 사업과 전시 경제 체계로 국민들의 마음을 현혹했던 파시스트의 흔적은 이제 지워져야 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대형 물탱크에 칠해놓은 “무솔리니는 다 옳다”는 문구를 지우려고 수십 미터 높이에 올라갔지만, 주정뱅이 봄볼리니는 힘이 빠진 채 주저앉아 와인만 들이킬 뿐이다.   

   

“사람들은 나를 천하의 바보로 여겨. 경멸한다고.”


하지만 봄볼리니도 이데올로기가 만든 모순덩어리 체제의 환상 속을 뛰어다닌 광대 중 하나에 불과했다. 파시스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다른 마을 사람들도 이제 살 길을 찾아야 하는 파시스트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있다. 마을의 유일한 대학생 파비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물탱크를 내려온 이 주정뱅이에게 마을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고, 오히려 멍청하다는 이유로 봄볼리니는 엉겁결에 파시스트로부터 시장직을 물려받는다.    

 

“사람들이 술에서 깨면 시장직에서 곧바로 끌어내릴 것”이라는 아내 로사의 장담을 비웃듯,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탐독자가 된 봄볼리니는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마을사람들을 다루기 위해 주민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마을에는 말라테스타 집안의 딸인 카테리나도, 무솔리니의 군대에 몸담았다가 부대원은 전멸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탈영한 투파도 돌아온다. 무력으로서의 파시즘 국가가 사라지고 난 후 마을은 저마다의 입장과 생각이 뒤섞인 용광로처럼 꿈틀댄다. ‘멍청이’ 봄볼리니의 ‘지도자 자질’은 독일군의 마을 진입이라는 뜻밖의 변수로 시험대에 오른다.     


마을의 주 수입원인 와인을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을 직감한 주민들은 혼란에 빠진다. 파투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봄볼리니는 마을 창고의 와인 130만병 중 100만병을 로마시대 동굴로 옮기기로 한다. 주민 1200명이 며칠에 걸쳐 와인을 옮기는 과정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 내몰렸던 마을 사람들은 화해와 서로에 대한 이해의 싹을 틔운다.     


산타 비토리아 마을. 출처:https://www.amalficoast.com


영화의 배경 산타 비토리아는 토리노 남동쪽으로 약 45km 떨어진 마을이다.(아쉽게도 촬영은 로마 근교에서 이뤄졌다.) 마을 이름은 여신 빅토리아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거나 로마 군대와 킴브리족(Cimbri)이 벌인 Campi Raudii 전투, 그리고 로마와 고트족간의 전투에서 거둔 기념비적인 두 개의 승리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 마을의 수호성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실제 이 마을은 영화에서처럼 실제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데 타나로(Tanaro) 강의 평원을 내려다보는 것이 가능하고,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성탑도 우뚝 서있다. 수많은 침입자들을 방어하기 위한 지형이라 사라센의 침입 때는 은신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수세기동안 아스티(Asti)의 주교 등 수도원 소유였다가 18세기 후반 사보이 왕국으로 병합되었다.     


이 지역은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등 이탈리아의 부르고뉴라 불릴 만큼 좋은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네비올로 품종을 중심으로 가장 많은 DOCG 등급의 와인을 가지고 있으며 토스카나와 더불어 이탈리아 와인의 중심지로 꼽히는 곳이다. 독일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도 이 곳의 와인을 수집하려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독일에서도 유명한 베르무트 와인을 만들기 위해 와이너리 친차노에 납품하는 와인을 가져가려는 것으로 나온다. *피에몬테 와인에 대해서는 이전 글 ‘청춘아, 조용히 웃을 때가 되었다(https://brunch.co.kr/@penwrite/5) 참조.     


토리노 지역에서 성장한 와인 회사 친차노(CINZANO)가 만드는 베르무트는 간단히 말해 각종 약초를 첨가한 강화와인이다. 단순히 알코올 농도가 높은 술을 와인에 첨가해 주도를 높인 세리나 포트 같은 다른 강화와인(fortified wine)과 달리 각종 식물을 첨가해 특유의 향을 강조한 와인이다. 도수가 높으면서도 단맛과 향긋함을 주는 와인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면 속성이 다른 것도 버무려낸 파시즘과 베르무트는 묘한 대비를 이룬다.      

*친차노 가문은 1568년부터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전통적으로 와인을 생산해 왔으며 1707년에 유니버시티 오브 마스터 디스틸러리(University of Master Distillery)에서 와인생산 공식업체로 인정을 받았다. 1757년에 카를로 스테파니와 조반니 자코모 친자노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부의 거리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토리노의 도라 그로사 거리(Via Dora Grossa)에 가게를 열었는데 이것이 지금 회사의 모태가 됐다. 처음에는 스파클링 와인을 주로 생산했으나 1786년에 출시한  베르무트인 친자노 로소(Cinzano Rosso)가 토리노의 중상류층에게 큰 인기를 얻자 베르무트를 주력 상품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정열·프라이드를 뜻하는 빨간색과 기품·전통·지중해의 깊이를 뜻하는 푸른색을 사용한 로고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영화 속 마을의 와인보관소 문에도 친자노의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회사는 한 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은 마로네가(Marone family)의 소유였다가 1992년에 영국의 그랜드 메트로폴리탄에 인수됐고 1999년에는 캄파리 그룹에 인수됐다.      



와인은 산타 비토리아 마을의 존재 증명이다. 그리고 수많은 이념과 폭력, 다툼으로 일그러져도 와인 앞에서는 입을 다물게 만들 뿐이다. 와인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 사람의 사람다움을 일깨우는 것이 와인이다. 카테리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와인 이동대열에 끼어있는 파투에게 묻는다. “고작 와인이고 마을일텐데” 왜 이렇게 신경을 쓰냐고. 농부에서 파시스트군인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파투는 “한번 농부는 영원한 농부”라고 대답한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던 카테리나 말라테스타도 와인 옮기는 일에 동참한다.

*말라테스타라는 이름이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1853~1932)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바쿠닌, 크로포트킨, 엠마 골드만과 함께 아나키즘 운동을 이끌다 파시스트의 탄압을 받아 세상을 떠난 그의 이름이, 사랑했지만 파시스트가 된 남편과 결별한 카테리나 말라테스타와 겹치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와인에 대한 영화, 혹은 이념 갈등에 따른 화해를 이야기하는 이 영화가, 국내에는 안보영화로 수입돼 상영됐다는 사실에는 웃을 수밖에 없다. 코미디의 형식을 빌어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영화가 유신의 기치를 높이세운 시점에 안보영화로 상영된 것은 아이러니다.     


“안보를 우선으로 하는 당국의 정책에 따라 한국영화계는 방화, 외화할 것 없이 체제개편을 위해 진통을 겪고 있다. 지난 12월에 발표된 영화시책은 ‘안보우선’의 새 가치관 확립과 안보에 대한 책무 수행에 국민이 자진 성실토록 하는 내용의 영화를 제작 권장한다는 명제 밑에 방화와 외화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한편 국가가 요구하는 안보영화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안보영화에 역점을 둔 이번 시책은 72년도 제작편수를 150편으로 한정하고 이 가운데 30편은 안보영화를 제작해야 되고 또 다른 30편은 관수영화용으로 확보, 나머지 90편만을 제작자들의 취향에 따른 건전영화 쪽에 쓰도록 했다. 매달 안보영화가 방화 두 편, 외화 한편 정도가 상영되도록 했다. 이같은 실정에 비춰 당국이 지난해 ‘산타 비토리아의 비밀’을 수입한 업자에게 특별외화 쿼터를 배정해 준 것은 당국이 생각하고 있는 안보영화에 대한 예시로 받아들여진다. 산타비토리아의 비밀은 나치 독일군의 침공을 받은 시민들이 일치단결해서 항쟁하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국난을 당했을 때 국민총화로 그것을 극복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 안보영화인 셈이겠다.”

- 동아일보, 1972년 1월12일자 5면 ‘줄지을 안보영화’ 中     


위기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봄볼리니는 광대다운 연기를 펼친다. 감금했던 파시스트를 고문에 내몰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는 용기로 와인이 30만병뿐이라는 거짓말을 사실로 속이는데 성공한다. 비록 친위대의 뒤늦은 연락에 거짓임이 노출되지만 마을 주민들의 꽉 다문 입술에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한다. 사람들은 바보처럼 여겼지만, 봄볼리니는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한” 군주의 덕목을 달성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떠나가는 독일군은 봄볼리니에게 마지막 총구를 겨누지만 끝끝내 감춰진 와인을 얻지 못한 채 차에 오른다. 와인을 둘러싼 마지막 전투는 결국 산타 비토리아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성을 내려가는 독일 장교 프룸(Prum)의 손에는 와인 한 병이 들려있을 뿐이다.     


독일군이 떠나는 날 구두 수선공 바발루체(Babbaluche)가 봄볼리니에게 말한다.


“난 무정부주의자였지만 그 의미는 몰랐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만 빼고.

의미 있는 게 있다면 이 냄새나는 동네뿐일 거야.”     


이념과 이익의 갈등 속에서 사람들은 다투고 결별하고 서로 윽박지르기도 한다. 그 뜨거운 삶의 한가운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만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른다. 비록 능력이 없어서 사랑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지 않을 용기만 가지고 산다면 말이다. 이데올로기는 사라지고 정파와 이익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온갖 모략꾼들이 표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즈음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지도자의 리더십에 관한 고전적인 저작이자 실용서 정도로 활용하는 사람들이라면, 영화는 그 책을 다시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하도록 해야 합니다.”(17장)

“군주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요새는 인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20장)

_마키아벨리 <군주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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