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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Sep 29. 2019

커피 같은 남자, 마약 같은 남자

_ 영화 <독전>과 커피, 그리고 케멕스(Chemex)

남자는 깨어있어야 했다. 나의 삶을 살지 못한 채, 살아 있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으므로. 씌워준 가면을 쓰고 맡겨진 일을 아무도 모르게 수행해야 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현실을 견디기 위해, 언제가 벗어날 그날을 위해 취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마약 조직원이었다.


남자는 깨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실적, 자존심, 혹은 복수를 위해 대신 미쳐있어야 했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악이 되어야 했으므로, 범인이라 믿은 자를 잡기 위해 아무 것도 믿지 않아야 했으므로, 지치지 않아야 했으므로. 그는 형사였다.

   

오랫동안 마약 조직의 거물 ‘이선생’을 추적해온 형사 원호는 미끼로 이용한 소녀 수정의 죽음 앞에 오열한다. 의문의 폭발 사고가 발생하고 버림받은 조직원 ‘락’의 도움으로 검거작전에 돌입한다. 아시아 마약 시장의 거물 ‘진하림’과의 거래를 통해 이선생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지만 일이 꼬이고, 진하림이 제거된 후에도 조직의 숨겨진 인물 ‘브라이언’과의 숨막히는 대결이 펼쳐진다. 스스로 이 선생이라 사칭한 브라이언을 잡은 경찰은 사건을 종결하지만, 락을 이 선생이라 믿은 원호는 반려견의 몸에 숨겨둔 GPS를 통해 노르웨이에서 락과 조우한다.    



지루한 휴일 오후를 보낼 심산으로 보았던 영화 <독전>은 심심풀이 범죄스릴러물로 머무르지 않고 몇몇 디테일에서 다른 기운을 내품었다. “영화의 속도를 위해 친절한 설명을 덜어냈다”는 의도에 따라 어쩔 수 없는 개연성은 둔탁했지만, 질문이라도 그럴듯한 영화가 얼마나 되던가.     


“저 아니에요. 근데 저 맞아요. … 사진 속의 영락이는 그 전에 4살 때 공장 하역하던 트럭에 깔려 죽었대요. 신고 안 하고 그냥 묻었나 봐요. 저는 영락이 옷을 입고 영락이 밥그릇에 밥을 먹었어요. 서영락 취학통지서로 학교에 갔고 서영락 이름으로 주민등록증을 받았고요. 이 정도면 저는 서영락입니까, 아닙니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실 서영락의 정체를 의심하는 원호에게 ‘락’이 설명하는 저 대사에 이미 담겨져 있다. <독전>이 단순히 마약액션물의 외피를 벗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선생이라는 거대 마약상은 존재하지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실재한다고 믿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숱한 이 선생들은 나타났다 죽임을 당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과연 믿을 것인가? 결말부에서 서영락이 이 선생이었다는 사실이 암시되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대신 이해영 감독이 언론 인터뷰(bit.ly/2lXfnhF)를 통해 밝힌 내용에서 실체를 짐작할 수 있다.     


“이학승이란 재벌이 과거 마약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당시 실제로 한국과 홍콩, 일본을 오가는 마약 사업을 화이트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이학승이 부를 쌓다가 90년대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기존 방식을 못 쓰게 된다. 그럴 때 서영락이 등장해 16~17살에 농아 남매와 같이 라이카를 만들었다. 이학승이 그를 어린 나이에 전면으로 내세울 수는 없으니 이 선생이란 아이덴티티를 만들었다. 이학승과 진하림은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마약으로 부를 쌓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진하림은 90년대 초반 한국에서 내쫓기면서 중국으로 들어가 동북지역 마약왕이 된 인물이고. 그렇기에 이학승을 통해 락이 진하림을 알게 됐으리란 설정이 있었다.”  

  

영화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설정이 들어있다. 바로 커피다. 

소금 염전에서 청각장애 남매가 마약을 제조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잠복 중인 형사들의 대사가 나온다. 


“무슨 기계들이야? 어떻게 서른 시간동안 똑같이 일을 하냐.”

“쟤네 약 먹었잖아. 우린 커피 먹고.”


목적을 위해 지치지 않고 일해야 자에게 마약이 투입되고, 실체를 밝혀야 하는 자에게는 커피가 투입된다. 한 때는 악마의 음료로 불렸던 커피는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하는 도구였다. 그저 작은 애드립 정도로 여겼는데, 원호가 서영락을 끝까지 찾아가 조우한 장면에서 다시 커피를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커피는 케멕스라는 도구로 내린 커피다. 여기서 의도한 듯 의도하지 않은 디테일이 엿보인다.



케맥스 클래식 드리퍼는 사실 드리퍼와 서버와 한 몸으로 결합된 형태다. 커피에 물을 적셔 커피 알갱이 속에 담겨있는 성분들을 추출해내는 기구와 그렇게 흘러내린 검은 액체를 모아 잔에 따르는 기구의 기능과 모양이 일체형인 도구다. 마치 서영락과 이 선생을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양이 화학 실험 도구를 연상케 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소금공장, 혹은 터미널에서 마약제조를 위한 공정의 디테일을 이어가려는 모습마저 연상된다. 실제 케멕스는 실험실의 플라스크를 여러 형태로 변형하면서 현재의 모습과 같은 에어 채널이 달린 유리 플라스크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노르웨이에서 다시 조우한 두 사람.

“팀장님은 스스로를 믿으세요?”

“…….”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러게.”

“하지만 이 선생은 죽었어요.”

“그렇지 공식적으로는. 근데 넌 안 죽었잖아.”

“그래서요, 제가 누군데요? 전 제가 누군지도 몰라요. 내가 타고 온 컨테이너에는요, 우리 부모도 타고 있었어요. 밀항하던 길에 약에 쩔어 죽었어요, 둘 다, 내 앞에서.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커피 드실래요?”    


켸멕스로 내린 두 잔의 커피가 탁자 위에 올라오고 각자의 총도 함께 놓인다. “넌 살면서 행복했었던 적이 있었냐”는 원호의 질문이 끝나고 들리는 총성. 

총성이 울리고 홀로 걸어 나오는 원호(감독판 결말). 그는 모든 것을 없애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가 믿었던 것을 모두 없애는 방식. 죽은 것은 이 선생인가 서영락인가? 원호가 믿었던 것은 신념인가 집착인가? 영화의 영어 제목 ‘Believer’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준다.     


우리가 커피라고 부르는 것은 음료인가, 커피라는 이름인가. 이름이 달라지면 실체도 달라지는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_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에서.        




케멕스(Chemex)

1896년 독일 출생의 화학자 피터 슐룸봄(Peter Schlumbohm)가 미국으로 건너온 후 발명한 커피 추출도구. 전용 필터를 꼽은 후 뜨거운 물로 적시면 필터 종이는 유리 표면에 밀착되고 이 상태에서 커피를 통과해 내려진 뜨거운 물은 수증기를 발생시킨다. 이때 높아진 압력이 에어 채널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에어 채널이 매우 좁아 배출되는 수증기의 양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커피의 향이 잘 보존되는 구조다. 한 번에 여러 잔을 제공하기에도 유리하고 디자인도 예뻐 많이 애용되는 커피 추출도구다. 


케맥스 전용 커피 필터는 천연 펄프와 함께 곡물(성분)이 추가되어 있고 다른 필터와 비교했을 때 동일 면적 대비 20~30% 무거워 커피 가루를 완벽하게 걸러내며 적절한 추출 속도를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커피의 좋은 향미만을 투과 시켜 쓴 맛은 없애고 깔끔하며 풍부한 커피를 만들 수 있다.    


참고: 케멕스 추출 동영상

www.youtube.com/watch?v=_MqfdH1uL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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