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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ntimental Vagabond Oct 25. 2021

꾸준하다

냄비와 졸꾸



꾸준하다: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다.



20대의  내 별명은 냄비였다. 이걸 좋아했다 저걸 좋아했다, 이랬다 저랬다, 여기저기 기웃기웃 몸과 마음을 옮겨 다니는 날 보며 친한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 후 첫 회사로 PR 에이전시에서 일을 시작했었다. 해외 유명 브랜드 화장품이나 의류 브랜드를 PR 하는 일이었는데, 업무는 둘째치고 회사생활에 도무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6개월쯤 다니다 해외 자동차 브랜드를 PR 하는 에이전시로 옮겨갔다. 당시 자동차를 좋아했었기에 재밌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일 또한 여러 이유로 2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열병 같은 사랑을 끝내고 난 뒤 밥도 먹을 수 없어 입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는 소개팅이며 데이팅 어플이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짧게 짧게 만나길 반복했었다.


손바닥 뒤집듯 바꿔대는 나를 놀려대는 냄비라는 별명이 마음에 썩 내키진 않았으나, 그때의 나는 냄비가 아니라고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모든 것에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태였다. 꾸준한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일이든 관계든 자기만의 한우물을 파기 시작한 친구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하지만 지금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도 사랑도 내 시간과 마음을 온전히 쏟을 수 있는 나만의 둥지를 틀기 위해 탐색을 하던 시간일 뿐이었고, 그 탐색의 시간이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타인의 기준보다 좀 더 더디고 길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일과 사랑 하물며 좋아하는 취미마저도 한없이 방황하며 이리저리 옮겨다니기에 바빴던 나날들이, 어느 순간 변화하기 시작했다. 8년째 한 사람과 깊은 사랑을 하며 어느새 가정을 꾸렸고, 약 4년째 한 회사에 다니면서 회사와 함께 성장을 하고 있다. 30세에 시작했던 요가도 3년이 넘게 꾸준하게 하고 있고, 테니스도 1년째 매주 화요일 아침 꾸준히 하고 있다.


이런 나를 보며 30대가 지나 만난 회사 동료나 지인들은 '은희님은 참 꾸준하네요'라는 말을 종종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졸꾸가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꾸준하네요'라는 말이 칭찬을 듣는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와 드디어 나도 냄비를 벗어나 꾸준히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됐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막상 꾸준히 뭔가를 하다 보니 청개구리 심보처럼, 여기저기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며 새로운것들을 탐험하던 시절의 내가 다시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꾸준하지 못하게 이것저것 간만 보는 것 같은 내가 스스로 내키지 않았는데, 막상 무언가를 꾸준히 하기 시작하니 세상에 더 많은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호기심으로 새로운 것들을 탐험할 힘이 없어 꾸준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 지랄도 풍년이다. 안정적이지만 도전적이고 싶고, 꾸준하지만 새롭고 싶다. 나 스스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나는 항상 모순된 것을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럼 졸라 꾸준한 냄비가 되면 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의 끝에 내가 꾸준히 하는 것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한 가지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 꾸준하다는 것은 다른 충동이나 감정을 억누르고 참고 견디는 것과 명백히 다르다는 것이다. 꾸준함은 외부의 압력이 아닌 나의 선택이었다.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을 원동력으로 하기 때문이다.


consistent, steady는 endure 하는 것과 다르다. 존버와 졸꾸의 차이라고나 할까? 꾸준하고 싶지만, 버티며 살고 싶지 않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고 싶다. 그러다 좋아하지 않게 되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용기도 갖고 싶다. 또 그 마음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지혜와 나 스스로에게 항상 솔직함을 간직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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